[include(틀:역대 사마진 황후)] ||<-2> '''{{{#ece5b6 동진의 황후[br]{{{+1 康獻皇后 | 강헌황후}}}}}}''' || || '''[[시호|{{{#fff 시호}}}]]''' ||강헌황후(康獻皇后) || ||<|2> '''{{{#fff 출생}}}''' ||[[324년]] || ||[[서진]] [[허난성|하남군]] 양적현[br](現 [[허난성]] 위저우시 일대 추정) || ||<|2> '''{{{#fff 사망}}}''' ||[[384년]] [[6월 1일]] || ||[[동진]] [[장쑤성|단양군]] [[난징시|건강현]] 건강궁 현양전[br](現 [[장쑤성]] [[난징시]]) || || '''{{{#fff 능묘}}}''' ||숭평릉(崇平陵) || ||<|4> '''{{{#fff 재위}}}''' || '''{{{#fff 동진의 황후}}}''' || || 342년 ~ 344년 || || '''{{{#fff 동진의 황태후}}}''' || || 344년 ~ 384년 || ||<^|1><-2><:>{{{#!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fff 성}}}''' ||저(褚) || || '''[[휘|{{{#fff 휘}}}]]''' ||산자(蒜子) || || '''{{{#fff 이명}}}''' ||숭덕태후(崇德太后) || || '''{{{#fff 부모}}}''' ||부친 저부(褚裒)[br]모친 사진석(謝眞石) || || '''{{{#fff 부군}}}''' ||[[강제(동진)|{{{#000,#fff 강황제(康皇帝) 사마악(司馬岳)}}}]] || || '''{{{#fff 자녀}}}''' ||[[목제(동진)|{{{#000,#fff 효종(孝宗) 목황제(穆皇帝) 사마담(司馬聃)}}}]]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에서 태부를 지낸 도향정후(都鄕亭侯) 저부의 딸. 고작 10살일 때, 12살인 낭야왕 [[강제(동진)|사마악]]에게 [[정략결혼|시집을 갔고]], 훗날 사마악이 황제에 오르자 황후가 되었다. == 생애 == 저산자는 외가 쪽이 동진의 명문가인 진군 사씨(謝氏) 집안으로 배경이 화려한데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낭야왕 사마악의 왕비로 뽑혔다. 342년에 [[성제(동진)|진성제]] 사마연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이 너무 어려 사마악이 황위를 계승하자 황후가 되었다. 343년 9월, 사마악의 아들 [[목제(동진)|사마담]](司馬聃)을 낳았다. 344년 11월 18일, 사마악이 병사하고 어린 태자 사마담이 즉위하였다. 당시 2살밖에 되지 않은 사마담은 나이가 너무 어려 직접 정사를 돌보기 힘들었기에, 황태후가 된 저산자가 섭정해 국정을 도맡았고 중서감 [[하충]]이 그녀를 보좌했다. 사도 [[채모(동진)|채모]]를 비롯한 조정의 여러 명신들도 그녀와 안팎으로 적극 협력하니, 나라가 평안하였다. 저태후는 자신의 친족들에게도 엄격히 대하면서 그들에게 사사로이 상을 내리지 않았다. 이에 외척들은 함부로 설칠 수 없었고, 저태후의 아버지를 포함한 그녀의 가족들은 집에서도 저태후를 황태후답게 예를 갖추어 절하면서 깎듯이 모셔야만 했다. 357년 정월, 진목제가 마침내 15살로 성년이 되었다. 저태후는 손수 조서를 내려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돌려주면서 섭정의 종료를 선포하고 숭덕궁에 머물렀다. 아쉬워하는 신하들이 있었으나 태후는 더이상 자신이 나설 필요 없음을 조서로 재차 밝혔다. 361년 5월, 진목제가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진목제에겐 생전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저태후는 조서를 내려 진성제의 장남 사마비(司馬丕)를 황제에 올리도록 했다. 그러나 [[애제(동진)|진애제]] 사마비는 정사에 일절 관심이 없었고, 황로학을 숭배해 방사를 끌어들였으며, 불로장생에 미쳐 금석약(金石藥)이라는 정체불명의 약에 항상 취해있었다. 이런 무능한 통치가 1년 동안 지속되자 못한 대신들이 숭덕궁으로 가 저태후에게 섭정해달라 간청하니, 저태후는 다시 입조하여 진애제 대신 국정을 보았다. 365년 2월, 약기운으로 폐인처럼 지내던 진애제가 사망하고 후사가 없어 그의 동생 [[폐제(동진)|사마혁]]이 뒤를 이었다. 사마혁이 즉위했음에도 저태후는 계속 섭정했는데, 권신 [[환온]]은 제위를 탐하여 사마혁을 폐위시키고 싶어했다. 그는 사마혁에 관한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371년에 건강에 도착해 그 내용을 태후에게도 서신으로 언급하며 폐위를 넌지시 권했다. 불당에서 향을 피우던 저태후는 환온의 서신을 받아 반쯤 읽다가 접고 "나 또한 이를 근심하였는데 가슴이 찢어질 듯 하구나!"며 탄식했다. 환온이 대신들을 모아 마침내 사마혁의 폐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결국 저태후는 조서를 내려 사마혁을 동해왕으로 폐위시켰다. 이후 회계왕 [[간문제(동진)|사마욱]]이 황제에 올랐다. 더이상 섭정할 필요를 못 느낀 저태후는 숭덕궁으로 다시 돌아가 숭덕태후로 추앙받았다. 372년, 대사마 환온의 압박에 항상 두려움에 떨며 살던 간문제 사마욱이 자신의 어린 아들 [[효무제(동진)|사마요]](司馬曜)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저태후는 환온으로 하여금 [[문공(주)|주공 단]]의 선례에 의거해 어린 황제를 섭정하라 조서를 내렸으나, 조정 내에서 반환온파였던 [[왕표지]]가 결사반대하여 폐기했다. 환온은 원래 사마욱이 자신에게 선양할 것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사마요가 즉위했고, 섭정까지 못하게 되어 이를 매우 분통해 했다. 얼마 후, 환온이 죽었으나 환씨 가문의 권세는 여전하였으므로 그들이 정권을 잡는 것을 막고자 [[사안]]이 저태후를 불러와 섭정을 부탁했다. 376년, 효무제 사마요가 15세로 성년이 되자 저태후는 또다시 숭덕궁으로 물러났다. 384년 6월 1일, 저태후는 숭덕궁 현양전에서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효무제는 장례를 마치고 7월에 강제 사마악이 묻혀있는 숭평릉(崇平陵)에 저태후를 안장하였다. 그녀는 섭정만 3차례나 했으며, 살아있는 동안 황제가 무려 5번이나 바뀌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서)]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황후]][[분류:324년 출생]][[분류:384년 사망]][[분류:아시아의 섭정]][[분류:하남 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