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북량 군주)]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F8C74 0%, #39A78E 20%, #39A78E 80%, #0F8C74)" '''{{{#black 북량 제5대 군주[br]고창북량 제2대 군주[br]{{{+1 武拓王 | 무척왕}}}}}}'''}}} || || '''[[묘호|{{{#black 묘호}}}]]''' ||<(> 없음 || || '''[[시호|{{{#black 시호}}}]]''' ||<(> 무척왕(武拓王) || || '''[[성씨|{{{#black 성}}}]]''' ||<(> 저거(沮渠) || || '''[[휘|{{{#black 휘}}}]]''' ||<(> 안주(安周) || || '''[[연호|{{{#black 연호}}}]]''' ||<(> 승평(承平, 443년 ~ 460년) || || '''{{{#black 생몰}}}''' ||<(> ? ~ 460년 || || '''{{{#black 재위}}}''' ||<(> 444년 ~ 460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호십육국시대]] [[북량]]의 제5대 군주이자 고창북량의 제2대 국왕. == 생애 == 431년, [[북위]]에 인질로 보내졌다. 433년, 부왕인 [[저거몽손]]이 승하하고, 형 [[저거목건]]이 그 뒤를 잇자 인질 생활을 마치고 북량에 돌아왔다. 저거목건은 그를 낙도태수에 임명했다. 439년, 북위 제3대 세조 [[태무제]] 탁발도의 공격을 받아 도성인 고장이 함락되고 북량왕 저거목건이 투항하여 나라가 멸망했다. 태무제가 진북장군 봉답(封沓)을 보내 낙도를 치게 하니, 저거안주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남쪽의 [[토욕혼]]으로 달아났다. 도망쳐온 저거안주를 본 토욕혼의 왕 모용리연은 북위가 양주를 차지했음을 알고, 몹시 두려워하며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사막을 넘어 피난을 갔다. 선비 [[모용부]]의 토욕혼이 도망가고 홀로 남은 저거안주의 일행은 둔황으로 가, 마침 자신과 마찬가지로 도망쳐온 형 [[저거무휘]], 저거의득과 합류했다. 441년 11월, 저거무휘가 겨우 주천을 되찾았지만 북위가 보낸 토벌군에 의해 금세 다시 빼앗겼다. 저거무휘의 세력은 기근으로 인해 군량 부족에 시달렸고, 북위의 군사력 또한 막강했으므로, 저거무휘는 서역으로 본거지를 옮길 계획을 저거안주와 의논했다. 회의가 끝난 후, 저거무휘는 저거안주에게 5,000명의 병력을 주어 서쪽의 [[선선]]으로 출병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선선국왕 비룡(比龍)이 나가서 항복하려던 찰나, 북위의 사신이 선선국에 도착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종용했다. 저거안주의 군대가 선선국의 도성 앞까지 도착했을 때 비룡은 항복하지 않았고, 저거안주는 연달아 공격을 시도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이미 점령한 동성(東城)으로 군사를 철수시키고 그곳을 지켰다. 442년 4월, 형 저거무휘가 10,000명의 무리를 거느린채 둔황을 버리고 동성에 있는 저거안주와 합류하기로 했다. 저거무휘는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비룡은 더욱 두려움에 떨다가 도망쳤고, 선선국의 세자가 도성에서 나와 저거안주에게 투항했다. 저거무휘는 이렇게 선선국을 점령했지만, 그가 선선국에 도착했을 땐 이미 무리들 중 절반 이상이 사막을 건너다가 갈증과 더위로 죽은 상태였다. 442년 9월, 저거무휘가 고창을 공격해 자칭 고창태수였던 감상(闞塽)을 쫓아낸 뒤 그곳을 점령하고 고창북량 정권을 수립했다. 감상은 [[유연(민족)|유연족]]에게로 도망쳤다. 444년 6월, 형 [[저거무휘]]가 승하하자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했으며 선왕 저거무휘 때 사용한 승평(承平) 연호를 습용했다. 또한 남조의 [[송(육조)|유송]]에 사신을 보내 칭신하고 하서왕(河西王)에 봉해졌으며 도독량하사주삼주제군사(都督涼河沙州三州諸軍事), 양주자사(涼州刺史)에 임명되었다. 유송으로부터 정당한 후계자로 인정받은 저거안주는 곧장 저거무휘의 아들 저거건수(沮渠乾壽)의 군사를 몰수했다. 아버지로부터 왕위도 물려받지 못하고 병력까지 몽땅 빼앗겨 버린 저거건수는 저거안주를 원망했다. 450년, 이들 사이에 불화가 있음을 감지한 차사국의 왕 차이락(車伊洛)이 사람을 보내 저거건수를 자극하니, 저거건수는 이에 넘어가 자신의 백성 500여 호를 이끌고 북위로 갔다. 이후 차이락은 아들 차헐(車歇)을 도성에 남겨두고 언기국을 정벌하러 떠났다. 저거안주는 병사들을 이끌고 오솔길로 몰래 이동해 차사성을 기습으로 공략했고, 차헐은 도망쳐 아버지에게로 달아났다. 차이락과 차헐은 남은 무리들을 추스른 뒤 북위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459년, 유송에 지방 특산물 등을 조공으로 바쳤다. 460년, 감상의 아들 [[감백주]](闞伯周)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유연(민족)|유연족]]을 이끌고 고창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저거안주는 피살되었고, 고창북량의 왕족 저거씨들은 모두 죽어 멸족당했다. 저거안주가 죽자 유연족은 감백주를 괴뢰 국왕으로 추대했고, 이로써 감씨고창(闞氏高昌)이 시작되었다. == 여담 == 감백주가 고창을 함락시키고, 고창에 있었던 저거씨들을 싸그리 멸족시켰지만, 애왕 저거목건이 항복할 때 북위로 끌려간 북량의 왕족들이나 저거건수의 자손들은 멸족당하지 않아 중국 대륙에서 저거씨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다만, [[남북조시대]] 이후 여러 이민족들이 한족에 동화되어 이민족의 성씨를 버릴 때, 저거씨 또한 저(沮)씨, 거(渠)씨 혹은 좌(左)씨 등으로 바꾸면서 현재 중국에서도 저거(沮渠)를 성씨로 쓰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될 정도로 찾기 매우 힘들어졌다. == 둘러보기 == ||<-5><#39A78E> '''[[북량|{{{#black 북량의 역대 군주}}}]]''' || ||<|2> 제4대 척왕 [[저거무휘]] ||<|2> {{{+1 ←}}} ||<|2> '''제5대 무척왕 저거안주''' ||<|2> {{{+1 →}}} || 고창북량 멸망 || [include(틀:역대 북량 군주)] [include(틀:진서)] [include(틀:송서)]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황제]][[분류:460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