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장영규(張泳奎) || || 이명 ||장영규(張泳奎) || || 호 ||일성(一聲) || || 생몰 ||[[1895년]] [[6월 7일]] ~ [[1970년]] [[6월 27일]] || ||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군]] 광주읍 불효동 || || 사망지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군]]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장영규는 1895년 6월 7일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 불효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1월 일본 도쿄에 있는 [[와세다대학]] (조도전대학: 早稻田大學) 경제학부에 재학중 조선기독교청년회의 서기로 선출되어 재일유학생 단합을 위해 활동하면서 각종 연설회, 집회 등을 통하여 민족정기와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시대사조(時代思潮)를 전파하여 조서민족의 진로를 자각케 하는데 주력했다. 그해 2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세계에 천명되자, 그는 이에 고무되어 회원 40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각 부서 연락과 서무를 맡아 활동했다. 1919년 2월 7일, 장영규는 백관수(白寬洙)의 집에서 김도연(金度演)·이종근(李琮根)·최원순(崔元淳)·최승만(崔承萬) 등과 만나 독립선언으로 주동자가 체포될 때 후속 거사를 주관하도록 위임받았다. 이후 그는 2월 8일에 3천여 명의 유학생이 도쿄 신전구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집합케 해 [[2.8 독립선언]]이 발표되도록 지원했고, 2월 12일 도쿄 [[YMCA]] 기숙사에 있는 최승만의 방에서 변희용(卞熙瑢)·장인환(張仁煥) 등과 함께 제2차 유학생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여 그 준비단계로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소집촉진부 취지서를 600여매를 등사해 유학생들에게 배부하고 시위를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경찰에게 탐지되어 체포되고 말았고, 이후 몇달간 옥고를 치르다 풀려났다. 하지만 1924년 4월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가 더욱 극심해져 일본과 국내에서 피신 생활을 지속해야 했다. [[8.15 광복]] 후에는 광주에서 조용히 지냈고 1970년 6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장영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광주광역시 출신 인물]][[분류:1895년 출생]][[분류:197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