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1 張文瓘 | 장문관}}}''' || || '''시호''' ||<(> 의(懿) || || '''성''' ||<(> 장(張) || || '''이름''' ||<(> 문관(文瓘) || || '''자''' ||<(> 치규(稚圭) || || '''부친''' ||<(> 장건웅(張虔雄) || || '''출생''' ||<(> 606년 ~ 678년 || || '''출신''' ||<(> 패주(貝州) 무성현(武城縣) || || '''국적''' ||<(> [[수나라|수]](隋) → [[당나라|당]](唐)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재상으로 자는 치규(稚圭). == 생애 == 606년에 장건웅의 아들로 태어난 장문관은 [[정관(연호)|정관]] 연간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병주 참군으로 관직을 시작하였고, 당시 병주 장사였던 [[이세적]]이 장문관을 많이 예우하였다. 이후 장문관은 수부원외랑이 되었는데, 당시 장문관의 형인 장문종(張文琮)이 상서성에서 호부시랑으로 있었고, 형제가 같은 상서성에 있는 것이 제도에 맞지 않아서 장문관은 결국 운양현령(雲陽縣令)이 되었다. 장문관은 용삭 연간[* 661년 ~ 663년]에 들어서 동동서대사인, 참지정사로 제수되고, 동대시랑, 동동서대삼품을 지냈다. 671년 고종이 낙양을 순행하면서 장문관은 장안에 남아 태자 [[의종(당 추존)|이홍]]의 대리청정을 보좌하기도 했다. 672년 장문관은 태자좌서자를 겸임하고 대리경으로 임명되었다. 장문관은 대리경으로 임명된지 10일 만에 400여 건에 달하는 사건을 공평하게 판결하여, 당시 사람들은 정관 연간의 대주에 비견하였다. 675년 장문관은 시중으로 임명되고 태자빈객을 겸임하였다. 장문관은 대신들의 주청에 대해 많은 반박을 올려서 고종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장문관이 와병 중일 때 조정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고종은 장문관과 논의했는지에 대해서 대신들에게 물었는데, 장문관과 상의를 한 내용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허가하였다. 676년 당나라가 [[신라]]와의 [[나당전쟁|전쟁]]을 치른 이후, 당나라는 [[토번 제국]]과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678년, 고종은 나당전쟁 이후에도 신라 정벌에 대해 미련이 있었는지 대신들을 소집하여 신라 정벌을 논의하도록 하였는데, 당시 와병 중이던 장문관은 병을 무릅쓰고 고종에게 회견을 주청하였다. 장문관은 고종을 회견하면서 지금은 토번과의 전쟁이 급선무인데 신라를 정벌한다면 당나라는 [[양면전쟁]]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며 신라 정벌을 반대하는 간언을 올렸다. 결국 고종은 장문관의 간언을 받아들여 신라 정벌 논의를 중단하였고, 장문관은 이후 얼마 안 있어 사망하였다. 사후 장문관은 유주 도독으로 추증되었고 의(懿)라는 시호를 받았고, 이홍이 묻힌 공릉에 배장되었다. == 여담 == * 이세적이 입조할 때, 장문관과 부하 관리 2명이 남았는데, 이세적은 부하 관리 2명에게 각각 칼과 옥대를 선물하였지만 장문관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장문관이 이를 의아하게 여기자, 이세적은 장문관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무엇을 주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 장문관이 대리경으로 임명되면서 공정하게 판결을 내리자, 판결을 받은 죄수들은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장문관이 병으로 눕게 되자, 대리시에 수감된 죄수들은 기도를 올려 장문관이 정무를 볼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다가 장문관이 대리시를 떠나게 되자, 대리시에 수감된 죄수들은 장문관이 떠난 것을 슬퍼하였다고 한다. * 장문관의 집안은 4명의 아들들이 모두 3품의 관직에 올라서, 당시 사람들은 장문관의 집안에 대해서 만석장가(萬石張家)라고 불렀다고 한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06년 출생]][[분류:678년 사망]][[분류:허베이성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