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공신]][[분류:조선의 문관]][[분류:상장군계 인동 장씨]][[분류:김포시 출신 인물]][[분류:1566년 출생]][[분류:1629년 사망]][[분류:형조판서]][[분류:병조판서]]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인 전 공공기관인, rd1=장만(1954))]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디스라이트의 장만, rd1=장만(디스라이트))] ---- [include(틀:조선 진무공신)]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511208, #7e2f22 20%, #7e2f22 80%, #511208)"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충정공(忠定公)'''[br] {{{+1 '''장만'''[br]'''張晩'''}}}}}} || ||<-2> [[파일:external/www.igimpo.com/29809_15683_3242.jpg|width=300]][br][* 1625년 [[이괄의 난]] 진압의 공으로 [[인조]]에게 하사받은 공신상. [[눈병]]으로 인해 [[안대]]를 찬 모습이다. 나중에 가면 장만은 눈병이 악화되어 왼쪽 눈의 시력을 상실한다.] || || '''출생''' ||[[1566년]] ([[명종(조선)|명종]] 21년) || || '''사망''' ||[[1629년]] ([[인조]] 7년) (향년 63세) || || '''본관''' ||[[인동 장씨]] || || '''시호''' ||충정(忠定) || || '''자''' ||호고(好古) || || '''호''' ||낙서(洛西)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장군계 인동 장씨|인동]](仁同)[* 경(京)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이다. 시호는 충정(忠定). [[고려]] 말 태상경(太常卿)을 지낸 장백(張伯)의 6대손이며, [[인조]] 때 주화파의 거두 [[최명길(조선)|최명길]]의 장인이기도 하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2018_002|#]] == 가계 == 장만의 [[본관]]은 [[상장군계 인동 장씨|인동]](仁同)로, 고려 말에 [[태상경]]을 지낸 장백의 6대손으로 7대째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벼슬을 지내온 전형적인 [[사대부]] 문벌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조판서]] 장철견(張哲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인(舍人) 장계문(張季文)이고, 아버지는 [[군수]] 장기정(張麒禎)이며, 어머니는 [[배천 조씨]](白川趙氏)로 조광침(趙光琛)의 딸이다. 6남 3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위로는 13살 터울의 맏형 장오와 6살 터울의 중형 장준 그리고 누님이 셋 있으며, 뒤로는 동생 장난과 [[측실]]의 동생 장환, 장훈이 있다. [[선조]] 24년(1591년) 장만은 별시 문과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날 형 장준과 조카 장희한도 무과에 급제하였고, 후일 종제 장돈과 서제 장환, 장훈도 무과에 급제한다. 이때부터 인동장씨 집안이 유명한 무관의 가문이 되어 더욱 많은 무관이 인동장씨 가문에서 나오게 되었다. [[영조]] 때 [[장붕익]]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 생애 == 1566년 [[서울]] [[필운동]]에서 종6품 가평현감을 지낸 아버지 장기정(張麒禎)과 어머니 [[조(성씨)|배천 조씨]](白川 趙氏) 조광침(趙光琛)의 딸 사이의 6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0살 무렵 부친 장기정이 옥천군수로 발령받아 지방으로 내려가자 함께 내려가 옥천에서 지냈다. 일찍이 학문에 매진하여 14세 때(1579년) 경시(京試) 합격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게 된다. 1589년 증광시 생원시와 진사시에 각각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589_042456|3등 26위]],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589_042577|3등 47위]]로 입격하였으며, 2년 뒤인 1591년 별시 문과에 병과 3위로 급제하여[[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591_004394|#]]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예문관 검열(檢閱)·[[성균관]] 전적(典籍)·예조좌랑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종전 후 1599년에는 봉산군수(鳳山郡守)가 되었다. 1619년 형조 판서에 올랐으며, 1622년 병조 판서로 있을 당시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대책을 건의하였고 이로 인해 광해군의 분노를 사게 된 그는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낙향해 은둔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팔도 도원수(八道 都元帥)로 등용되어 당시 [[후금]] 때문에 흉흉했던 북방을 수비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지방군과 패잔병들을 긁어 모아 열세인 상황에서도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또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 여담으로 눈병 때문에 안 좋았던 한 쪽 눈이 이 사태 이후로 더욱 심히 상해졌으며 위 사진에서 나왔다시피 평소 안대를 차고 다녔다한다.] 1627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났으며 적을 막지 못한 죄로 부여로 [[유배]]되었으나 이전에 세웠던 공으로 복관되었다. 1629년 11월 15일, 장만은 64세의 나이로 [[한양]] [[반송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며, 1635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김포]] [[통진]]의 향사에 [[제향]] 되었다. [[문무겸비|문무와 재략을 갖춘 무장이었으며]] 많은 부하를 통솔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저서로 [[낙서집]](洛西集)이 있다. == 여담 == * "장만하다."의 어원이 이 사람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세종(조선)|세종]] 시대부터 쓰인 우리말이라 [[민간어원]]에 가깝다. * 조선 중후반기를 묘사하고 있는 네이버 웹툰 작품 [[칼부림(웹툰)|칼부림]]에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