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장도빈}}}'''[br]'''張道斌'''}}}}}}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img.nate.com/241643001.jpg|width=100%]]}}} || || '''아호''' ||산운(汕耘) || || '''본관''' ||[[장(성씨)|결성 장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8387|#]]] || ||<|2> '''출생''' ||[[1888년]] [[10월 22일]] || ||[[평안도]] [[상원군]] 읍내방 동부리[br](현 [[평양시]] [[상원군]] 상원읍) || ||<|2> '''사망''' ||[[1963년]] [[9월 12일]] (향년 74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863호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역사학자, 교육가, 언론인.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88년 10월 22일 평안도 상원군 읍내방 동부리(현 평양시 상원군 상원읍)에서 자작농인 장봉구(張鳳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장제국(張濟國)의 훈도로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 고향에서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1902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한성사범학교]]에 평양 감사의 천거로 입학, 1906년 졸업하였다. 1907년에 [[안창호]]의 주도로 국내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 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8세 연상인 [[신채호]] 등과 함께 [[양기탁]]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은사 [[박은식]]의 소개로 약관의 나이에 [[대한매일신보]] 논설기자가 되었다. 당시 와병 중이던 신채호 주필을 대신해 논설을 집필했다. 1909년에는 단재와 일주일씩 교대로 논설을 쓸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당시 친일 내각과 친일 단체를 비판한 글인 '금일 대한민국의 목적지', '일인하지(日人何知)' 등은 매서운 항일 필봉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1910년에는 정식 논설 위원이 되었고, 그 후 논설 주필로 활동했다. 이렇게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도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보성전문학교 법과]]를 다니면서 법학 공부를 병행했다. 1910년 일제 강점으로 신문사의 명맥이 끊어진 후인 1911년에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경성부 오성학교]](五星學校) 학감으로 있다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인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검거 열풍이 일자 1912년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 일단 북간도로 피신했다가 1913년 러시아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그곳의 신한촌(新韓村)에서 다시 신채호를 만나고, [[최재형(독립운동가)|최재형]]·[[홍범도]]·[[이동휘]]·[[이상설]] 등 독립투사들과 교류했다. 보성전문학교 교수이던 [[이종호(독립운동가)|이종호]]의 '근업신문(勤業新聞)'에서 논설을 쓰기도 했다. 1916년부터 1918년 사이에 병고의 몸으로 귀국, [[평안북도]] 영변의 서운사(棲雲寺)에서 요양한 뒤 '국사'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를 계기로 평안북도 [[오산고등학교(서울)|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 [[조만식]] 교장의 초청을 받아 약 1년간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19년 [[동아일보]]의 발간을 출원하여 허가를 받았으나 운영을 양도하고, 이어 한성 도서 주식회사를 허가내어 1926년까지 사이에 잡지 '서울'·'학생계'·'조선지광(朝鮮之光)'을 발간하였다. 한편으로는 자영출판사 고려관(高麗館)을 설립, '조선사요령(朝鮮史要領)'·'조선위인전(朝鮮偉人傳)'·'조선역사록(朝鮮歷史錄)' 등 숱한 책자를 편찬하였다. 1927년부터 1945년 사이에는 연해주의 [[발해]] 고적 답사를 통한 역사 연구에 전념하였다. 1928년 발간한 '조선역사대전(朝鮮歷史大全)'은 식민사가들에게 경종을 울렸고, '대한역사(大韓歷史)'를 통하여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일제 말에는 [[조선총독부]]의 끈질긴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참의 제의를 거부하고 심산에 은둔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 월남하여 9월 19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동덕초등학교 뒷자리의 방 3칸에서 '민중일보(民衆日報)'를 창간, 공산 언론에 대항하였다. 같은해 조선신문주간회(朝鮮新聞主幹會)를 조직하여 대표가 되었다. 1947년에는 6촌 동생 [[장형(독립운동가)|장형]]이 [[단국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참여하였다.[* 장형은 원래 [[신익희]]가 주도하던 [[국민대학교]]의 이사장이었으나, 신익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1930년)|한국독립당]]을 떠나 [[이승만]]측과 [[한국민주당]]에 참여하자, 이를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이라 여겼다. 그래서 장형은 신익희와 결별하고, 임시 정부와 김구의 독립 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으로서, 1947년 11월 1일 단국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단국대학교 초대 학장을 지냈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 국사학 교수로 봉직하였다. 1949년 '민중일보'가 화재를 당하여 재건이 어렵게 되자, [[윤보선]]에게 판권을 무상으로 양도하였다. 노후에는 서울시사 편찬위원·[[고등고시]] 위원 등을 지냈다. 1963년 9월 12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9130023910701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3-09-13&officeId=00023&pageNo=7&printNo=13036&publishType=00010|별세했으며]],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사후 [[경기도]] [[광주시|광주군]] 구천면 고덕리(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서울)|고덕동]]) 가족묘지에 유해가 안장되었다가, 2000년 10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 가족 관계 == 슬하에 장치혁(張致赫) [[고합그룹]] 창업주와 [[중앙대학교]] [[무역학과]] [[교수]]를 지낸 장치순(張致順)이 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언론인]][[분류:동아일보 관련 인물]][[분류:고려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사범대학]][[분류:한국의 역사학자]][[분류:대한민국의 교수]][[분류:인문과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교사]][[분류:상원군 출신 인물]][[분류:결성 장씨]][[분류:1888년 출생]][[분류:196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사립대학 총장]][[분류:단국대학교 재직]][[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실향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