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전량 군주)] ---- ||<:><-2><#317589>'''{{{#ece5b6 전량 부흥군 수장 [br] {{{+1 張大豫 | 장대예}}}}}}''' || ||<|2><#317589> '''[[출생|{{{#ece5b6 출생}}}]]''' ||불명 || ||[[전량(오호십육국시대)|전량]] 양주 [[간쑤성|안정군]] [[핑량시|오씨현]][br](現 [[간쑤성]] [[핑량시]]) || ||<|2><#317589> '''[[사망|{{{#ece5b6 사망}}}]]''' ||387년 7월 || ||[[후량(오호십육국시대)|후량]] 고장 [br] (現 [[시베이]] [[우웨이시]]) || ||<:><#317589> '''[[재위기간|{{{#ece5b6 재위기간}}}]]''' ||<(> [[386년]] ~ [[387년]] || ||<:><#317589> '''[[성씨|{{{#ece5b6 성}}}]]''' ||<(> 장(張) || ||<:><#317589> '''[[휘|{{{#ece5b6 휘}}}]]''' ||<(> 대예(大豫) || ||<:><#317589> '''{{{#ece5b6 자}}}''' ||<(> 불명 || ||<:><#317589> '''{{{#ece5b6 부모}}}''' ||<(> 부친 [[장천석]][br]모친 좌부인 초씨(焦氏) || [목차] [clearfix] == 개요 == [[장천석]]의 막내아들로 [[전량(오호십육국시대)|전량]] 시절 세자였다. 383년 11월에 일어난 [[비수대전]] 이후 전량의 부흥을 꿈꾸다가 [[동진]]으로 도망친 아버지보다 일찍 사망하고 말았다. == 생애 == 전량이 멸망하기 전, 형 장대회를 고창공(高昌公)으로 밀어내고 세자가 되었다. 이후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의 세조 선소제 [[부견]]이 전량을 멸망시키자 아버지를 따라 장안으로 거처를 옮겼다. 비수에서의 참패 이후 전진은 이민족들의 자립으로 대혼란에 빠졌고, 장천석은 이틈에 가족들을 버리고 혼자 장안을 빠져나와 동진으로 망명했다. 아버지가 적국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처형당할 위기에 놓였지만, 장사교위 왕목(王穆)이 장대예를 숨긴 채 장안을 나온 덕에 살 수 있었다. 왕목은 장대예를 데리고 하서(河西)의 선비족인 [[독발부]]에게 가니, 독발부의 수령 독발사복건은 이들을 과거 전량의 수도 고장(姑臧)과 가까운 위안(魏安)으로 보냈다. 위안 사람 초송, 제숙, 장제 등은 수천 명을 모아 장대예를 맞이하고 그를 주군으로 섬겼다. 태안 원년(386), [[저족]]의 군주 [[여광(후량)|여광]]의 세력이 점거 중이던 창송을 함락시키고 그곳의 태수 왕세강을 사로잡았다. 여광은 보국장군 두진을 보내 반격했으나 패배했고, 장대예는 기세를 몰아 [[후량(오호십육국시대)|후량]]이 차지하고 있는 고장을 향해 나아갔다. 왕목은 고장 공략은 시기상조이며 영서(嶺西)부터 차지해 우선 고장을 양면으로 압박하는 형세로 만들자는 계책을 내놓았지만 장대예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장대예는 무군장군, 양주목을 자칭하고 연호를 봉황으로 정했다. 그리고는 왕목을 장사로 삼아 군현에 격문을 돌리게 하니, 건강태수[* 양주(凉州)의 고장 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장강 이남 동진의 수도인 건강(建康)과 한자까지 똑같으나 완전히 다른 지역이다.] 이섭(李隰), 기련도위 엄순이 군사를 일으켜 호응했다. 장대예의 무리는 어느새 30,000명으로 불어나 고장 서쪽에 위치한 양오(楊塢)까지 공격해 손에 넣었다. 장대예의 군대는 양오에 주둔했고, 독발사복건도 자신의 아들 독발해우에게 독발선비족 군대 30,000명을 주어 고장성 남쪽에서 장대예를 돕도록 했다. 이에 여광은 직접 출격해 우선 독발부의 구원군을 박살내고 20,000여 명을 죽인 뒤, 독발해우를 참수했다. 독발부의 군대가 패배하자 양오에 주둔해있었던 장대예는 목표를 바꿔, 하주(夏州)의 임조(臨洮)현을 침략해 백성 5,000여 호를 약탈하고 구성(俱城)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태안 2년(387) 7월, 여광이 팽황과 서경(徐炅)을 거느리고 장대예의 세력을 공격해 무찔렀다. 대패한 장대예는 광무(廣武)로, 왕목은 건강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해 8월, 장대예는 광무에서 붙잡혀 결국 고장으로 압송되었고, 여광이 그를 참수했다. 왕목은 장대예의 사후에도 세력을 이끌며 후량군과 싸웠지만 패배하여 단기로 도망치다가 후량의 장수 곽문에게 잡혀 살해당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서)]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387년 사망]][[분류:핑량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