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당나라의 상서우복야)] ||<-2> '''시흥문헌백(始興文獻伯)[br]{{{+1 張九齡 | 장구령}}}''' || || '''작호''' ||<(> 시흥현백^^(始興縣伯)^^ || || '''시호''' ||<(> 문헌^^(文獻)^^ || || '''성''' ||<(> 장(張) || || '''이름''' ||<(> 구령(九齡) || || '''자''' ||<(> 자수(子壽) || || '''부친''' ||<(> 장홍유(張弘愈) || || '''출생''' ||<(> 673년 ~ 740년 || || '''출신''' ||<(> 소주(韶州) 곡강현(曲江縣) || ||<|2> '''재임''' ||<(> '''{{{#ece5b6 당의 상서우승상}}}''' || ||<(> 736년 ~ 737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당나라의 인물로 자는 자수(子壽). 현종 시기의 재상으로 유명한 인물이며, 또한 생전에 [[안록산의 난]]을 현종에게 경고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 생애 == 장구령은 13살에 광주(廣州) 자사 왕방경(王方慶)으로부터 문학적 재주를 인정받아, 이를 계기로 원대한 포부를 품게 된다. 장구령은 702년 진사에 급제하여 교서랑으로 임명된다. 뒤에 장구령은 예종의 태자였던 이융기의 부름을 받았고, 중서령으로 있던 장열이 그를 매우 예우하였다. 장구령도 장열의 예우에 감사해하며 장열에게 의지하였다. 이후 723년에는 중서사인으로 임명되었다. 장열 사후에 장구령은 비서소감(秘書少監), 집현원(集賢院) 학사가 되었고, 중서시랑을 역임하였다. 733년에는 모친상을 마치고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로 임명되었고, 중서령, 수국사를 지냈다. 735년에는 금자광록대부가 더해졌고 시흥현백으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이임보]]의 등장으로 장구령은 이임보와 대립하게 된다. 이임보가 [[우선객]]이라는 인물을 재상으로 천거하자, 장구령은 여기에 대해 반대하였다. 장구령은 736년에 상서우승상으로 진위되었지만 지정사에서 파직되었다. 재상에서 물러난 뒤 장구령은 자신이 천거했던 감찰어사 주자양(周子諒)으로부터 탄핵을 당하여 형주 장사로 강등되었다. 장구령은 740년에 병으로 사망하여 형주(荊州) 대도독으로 추증되었고,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기타 == 장구령은 [[안록산]]이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유주를 어지럽힐 자는 바로 이 오랑캐이다. 또한 그는 현종에게 안록산이 위험하다며 경고를 날리기도 하였다. 당시 [[장수규]]의 비장이었던 [[안록산]]이 해족과 거란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에게 사형을 내리려고 하였다. >옛날 사마양저는 출군할 때 장가(莊賈)를 처형하였고, 손무는 책략을 전술하면서 궁빈을 처형하였습니다. 장수규가 군령을 행하려면 안록산은 마땅히 사형을 면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현종이 안록산을 사면하자, 장구령은 안록산에 대해 현종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했다. >장구령: 안록산은 이리의 새끼와 같아서 좀처럼 길들일 수 없으며, 그의 얼굴빛에는 반역할 상이 있으니, 신은 마땅히 죄에 따라 안록산을 죽여서 후환을 끊으시길 청합니다. >현종: 경은 [[왕연|왕이보]](王夷甫)가 [[석륵]]을 알아본 고사를 가지고 충량한 이를 그릇되게 해치지 마시오. 하지만 현종은 오히려 장구령의 경고를 일축하였고 안록산을 돌려보낸다. 이때 장구령이 현종에게 했던 경고는 장구령 사후에 [[안록산의 난|제대로 들어맞게 되었다]]. 그리고 뒤에 안록산이 반란이 일으키자, 촉 지방으로 피난을 간 현종은 이전에 장구령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매우 후회하였다고 한다. 그는 동생 장구고가 있었는데, [[남송]]의 명신이자 학자인 [[장준(송나라)|장준]]이 장구고의 후손이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73년 출생]][[분류:740년 사망]][[분류:쑤저우시(장쑤성)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