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브르타뉴 공작)] || '''이름''' ||장 3세 드 브르타뉴(Jean III de Bretagne)|| || '''출생''' ||[[1286년]] [[3월 8일]][br][[브르타뉴 공국]] 샹토소|| || '''사망''' ||[[1341년]] [[4월 30일]][br][[브르타뉴 공국]] [[캉]]|| ||<|2> '''재위''' ||<#E7E7E7,#424242>[[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1312년]] [[8월 27일]] ~ [[1341년]] [[4월 30일]]|| || '''아버지''' ||아르튀르 2세 드 브르타뉴|| || '''어머니''' ||리모주의 마리|| || '''형제''' ||친형제: 기 7세 드 리모주, 피에르[br]이복 형제: 장 드 몽포르, 베아트리스, 잔, 알릭스, 블랑슈, 마리|| || '''아내''' ||발루아의 이자벨[br]카스티야의 이사벨[br]사보이아의 잔|| [목차] [clearfix] == 개요 ==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28년간 브르타뉴를 평화롭게 이끌었지만, 후계 구도를 명확하게 하지 않아 24년간 이어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을 초래했다. == 생애 == 1286년 3월 8일 브르타뉴 공국 샹토소에서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2세 드 브르타뉴와 리모주 자작 기 6세 드 리모주의 딸인 마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친형제로 기 7세 드 리모주[* 1287 ~ 1331, 리모주 자작, 팡티에브르 자작], 피에르[* 1289 ~ 1312, 아베네스 영주]가 있었다. 1290년 어머니 마리가 사망한 뒤, 아버지 아르튀르 2세는 몽포르 여백작이자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의 왕비였던 드뢰의 욜랑드와 재혼해 장 드 몽포르, 베아트리스[* 1295 ~ 1384, 라발 영주이자 아퀴니, 비트레 남작 기 10세 드 라발의 부인], 잔[* 1296 ~ 1364, 카셀의 영주이자 말 백작인 로베르 드 플란데런의 부인], 알릭스[* 1298 ~ 1377, 방돔과 카스트르 백작 부샤르 6세 드 방돔의 부인], 마리[* 1302 ~ 1371, 푸아시의 생루이 수도원의 수녀.]를 낳았다. 장 3세는 어머니로부터 리모주 자작령을 물려받았으며, 1301년부터 1314년까지 이곳을 통치했다. 이후 두번째 아내인 카스티야의 이사벨에게 리모주 자작령을 일시적으로 부여했다가 다시 남동생인 기 7세에게 양도했다. 1312년 8월 27일 아버지 아르튀르 2세가 사망한 뒤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두번째 아내이자 자신의 계모인 드뢰의 욜랑드 및 이복 형제 장 드 몽포르와 유산 상속을 놓고 갈등을 벌였다. 그는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그의 아버지와 욜랑드 사이의 결혼이 적합하지 않다며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청원했으나 실패했다. 1317년, 욜랑드와 장 드 몽포르가 장 3세가 모든 영지를 독차지하는 건 부당하다며 [[교황청]] 소송을 걸었다. 이 소송전은 1328년까지 장기간 이어졌다. 교황 [[요한 22세]]는 1319년 생플로랑 드 소뮈르의 수도원장인 장 밀레가 이끄는 사도 위원회에 중재를 맡겼고, 1324년 장 밀레가 사망한 후에는 돌드브르타뉴의 주교인 기욤 메생을 포함한 다른 위원회에 맡겼다. 소송전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양자가 우호적인 합의를 맺고 끝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지리한 소송전을 벌이는 동안에도, 장 3세는 통치를 무난하게 수행했다. 그의 기간에 브르타뉴 주교들은 총 57명의 브르타뉴 출신 장학금 수혜자들을 위해 파리 대학교 내에 3개의 대학[* 콘월 대학, 플레시 대학, 트에귀에 대학]을 설립했다. 1314년, 장 3세는 아바구르 영주 롤랑 드 디낭이 지휘하는 브르타뉴 부대를 플란데런에 파견했다. 이들은 1315년에 프랑스 국왕이자 브르타뉴 공작의 주군인 [[루이 10세]]의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했다. 루이 10세는 공로를 인정해 장 3세에게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국경에 있는 생자크 드 뵈브롱 성채를 수여했다. 1328년, 장 3세는 [[필리프 6세]]의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해 카셀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가면서 필리프 6세가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했다. 그의 삼촌인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가 사망한 후인 1334년 5월 8일, 장 3세는 켄터베리 대주교의 중재 하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같은 해 5월 24일에 리치먼드 영지를 장 3세에게 수여했다. 1337년 [[백년전쟁]]이 발발한 후, 장 3세는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그는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으며, 리치먼드 백작으로서 잉글랜드 국왕의 봉신이었다. 그는 그는 고심 끝에 프랑스 국왕을 지지하기로 하고, 필리프 6세의 1339~1340년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했다. 1340년 프랑스 국왕의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자기 함대를 슬로이스 항구로 보냈지만,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군에게 파괴되었다. 이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투르네에서 대치한 필리프 6세와 함께 했고, 1340년 9월 25일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세가 1341년 6월 24일까지 9개월 동안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한 에스플레친 휴전 협약(Trêve d'Esplechin)을 체결할 때 현장에 함께 했다. 이후 필리프 6세와 겨울을 함께 보낸 그는 1341년 부활절에 브르타뉴로 돌아가다가 1341년 4월 말에 캉에서 중병에 걸려 몸져 누웠다. 그는 생전에 발루아 백작 샤를의 딸인 발루아의 이자벨(1292 ~ 1309),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산초 4세]]의 딸인 카스티야의 이사벨(1283 ~ 1328), 사보이아 백작 [[에도아르도(사보이아)|에도아르도]]의 딸인 사보이아의 잔과 잇따라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이에 장 3세의 친형제인 기 7세 드 리모주의 딸인 잔 드 팡티에브르와 이복형제 장 드 몽포르가 경합했다. 그는 자신과 유산 상속을 놓고 오래도록 대립했던 장 드 몽포르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잔 드 팡티에브르를 후계자로 내정하고 철저하게 교육시켰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친척인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정작 임종을 맞이할 때 후계자를 누구로 삼을지 정해달라는 가신들의 요청에 냉담하게 답했다. >"그런 일로 괴롭히지 말고 제발 날 좀 내버려 두시오." 1341년 4월 30일, 장 3세는 캉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플로에르멜의 카르멜 수도회에 안장되었다. 이후 잔 드 팡티에브르와 장 드 몽포르가 브르타뉴 공작위를 놓고 대립하면서, 장장 24년간 이어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의 막이 올랐다. [각주] [[분류:브르타뉴 공작]][[분류:리치먼드 백작]][[분류:1286년 출생]][[분류:1341년 사망]][[분류:백년전쟁/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