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파이널 판타지 14의 인스턴스 던전, rd1=시스이 궁)] [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include(틀:한국의 정원)] ---- ||<-3> {{{-1 {{{#ffd700 '''조선의 별궁'''}}}}}}[br]{{{+1 {{{#ffd700 '''자수궁'''}}}}}}'''[br]'''{{{#ffd700 '''慈壽宮'''}}}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자수궁터, 너비=100%, 높이=100%)]}}} || ||<-2> '''위치''' || [[한성부]] 북부 순화방[br]{{{-1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 68[* 구 [[지번주소]] [[종로구]] 옥인동 45-1.][*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는 [[윤덕영]]의 벽수산장과 [[이완용]] 집 터 사이다.(...)])}}} || ||<-2> '''설립시기''' || 1450년 || ||<-2> '''해체시기''' || 1661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10-09 15-07-36.jpg|width=100%]]}}} || || {{{#gold '''현재 자수궁 터'''}}} || [목차] [clearfix] == 개요 == 지금의 일대에 있던 [[조선]]의 [[궁|별궁]].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 역사 == 원래 [[무안대군|무안대군 이방번]]이 살던 집 터였다. 그러다가 [[문종(조선)|문종]]이 무안대군의 옛 집을 수리하고 아버지 [[세종(조선)|세종]]의 [[후궁]]들을 옮겨 살도록 한 것이 자수궁의 시초다.[* 문종실록 1권, 문종 즉위년 3월 21일 을축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003021_001|#]] ] [[성종(조선)|성종]] 시절에는 [[폐비 윤씨]] 및 세조와 예종의 후궁들이 살았는데, 그 중 세조의 후궁인 [[근빈 박씨]]가 살게 되면서 잠시 이름을 창수궁(昌壽宮)으로 바꾸기도 했다.[* 성종실록 179권, 성종 16년 5월 9일 무오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605009_002|#]] ] 이 외에도 [[단경왕후]]가 폐출되고 한동안 머무른 적도 있었고, [[인종(조선)|인종]]의 후궁 [[귀인 정씨(인종)|귀인 정씨]]도 자수궁에서 살았다. 당시 왕실 여성들은 불교에 대한 믿음이 강해서 후궁들도 머리를 깎고 [[출가]]하거나 또는 [[비구니]]와 함께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도 세종이 승하하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는데, 왕의 허락없이 한 일이라서 논란이 되었다. ] >"대저 여승[尼]이라는 것은 가장 상서롭지 못한 것인데 안일원(安逸院)ㆍ자수궁(慈壽宮)이 있으니, 그로 인연한 화(禍)가 지금 어찌 없겠습니까?" >---- >《[[중종실록]]》 중종 12년 8월 20일 >"자수궁(慈壽宮)은 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이 사는 곳이므로 엄숙하기가 궁금(宮禁)과 다를 것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미천하고 요사한 여중이 섞여 거처하는데 그 수가 매우 많아서 늘 불사(佛事)를 하는가 하면 요사한 방법을 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요령(搖鈴)과 목탁 소리가 바깥에서 들린다 하니, 매우 불미스러운 일입니다." >---- >《[[인종실록]]》 인종 1년 3월 24일 이때문에 자수궁에서 불사를 행한다고 끊임없이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정희왕후]], [[소혜왕후]], [[문정왕후]] 등의 불심 깊은 왕실 고위급 여성들의 비호가 있었고, 자수궁에서 사는 이들이 선왕의 후궁들이라는 점에서 유지될 수 있었다. 심지어 [[보우(조선)|불교가 잠시]] [[문정왕후|권력 층과 가깝던]] [[명종(조선)|명종]] 때에는 이 곳에 종각과 나한전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나한전은 [[절(불교)|절]]에서 아라한과(아라한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를 얻은 [[성자]]를 봉안하는 곳이다. 그래서, 아무리 비구니들이 같이 산다해도 엄연히 왕실 사람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신하들이 반대했다. ][* 명종실록 17권, 명종 9년 10월 30일 정유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910030_003|#]] ] [[임진왜란]] 이후 [[궁궐]] [[공사]]에 병적이었던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인왕산]]의 왕기(王氣)를 누른다는 명분으로 [[인경궁]], [[경희궁|경덕궁]][* 훗날 [[경희궁]]으로 개칭.] 등과 함께 옛 자수궁 일대에 큰 [[궁궐]]을 짓고 이름도 그대로 자수궁이라 불렀다. 그러나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은 사용하지도 못한 채 쫓겨났고, 자수궁은 '자수원(慈壽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아예 이원(尼院), 즉 [[비구니]]들을 위한 전용 공간으로 활용하였으며 많을 때는 최대 5,000여명의 비구니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명나라]] [[황실]]의 [[궁녀]]였던 굴씨(屈氏)도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함께 들어와 이 곳에 머물렀다. == 최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성균관 비천당.png|width=100%]]}}} || || {{{#gold '''옛 자수궁 자재로 세운 성균관 비천당[* 사진에서 보이는 지금 건물은 [[6.25 전쟁]] 때 불탄 것을 1988년에 [[복원]]한 것이다.]'''}}} || 1661년(현종 2)에 비구니의 폐해가 심하다는 부제학 유계의 상소[* [[비구니]]들이 잘못을 한 건 아니었다. 단지 [[사대부]]의 입장에서 [[한양도성|도성]] 한복판에 큰 [[절(불교)|절]]이 있고 비구니 수천 명이 머무른다는 것 자체가 못마땅하였을 것이다. 또한, 비구니 중에서 나이가 40세 이하인 자는 모두 시집가도록 한 조치에서 보듯이 무엇을 폐해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를 계기로 자수원을 폐지하여 없애고, 40세 이하인 경우 환속하여 시집가도록 하고, 40세가 넘은 [[노인]]들도 환속할 수 있도록 하되 [[한성부|성]] 밖으로 내보냈다.[* 폐지 논의를 하던 때에는 선왕의 후궁들 중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 이 자리에 [[한양도성|도성]] 내 5학 중 하나인 북학(北學)을 세웠으며 1663년(현종 4)에는 자수원 건물의 자재로 [[성균관]] 서쪽에 비천당(丕闡堂)과 일량재(一兩齋), 벽입재(闢入齋)를 세웠다. == 기타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E001983875_STD.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자교교회.jpg|width=100%]]}}} || || {{{#gold '''《경성부사》에 실린 자수궁교'''}}} || {{{#gold '''자교교회'''}}} || [[경복궁]]에서 자수궁 가는 길에 통행을 편하게 하기 위해 사이에 있던 백운동천(白雲洞川)에 '자수궁교(慈壽宮橋)'라는 [[교량|돌다리]]를 세웠다. [[일제강점기]]까지 남아있었으며 1927년 백운동천에 암거 공사를 진행하며 없어졌다. 줄여서 '자수교(慈壽橋)', '자교(慈橋)'라고도 불렸으며 그래서 근처 [[교회]] 이름도 이 다리에서 따와 '자교교회'가 되었다.[* 다만 한자는 '紫橋'다.]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