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임화}}}[br]林和'''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image/028/2008/10/16/7000111152_20081017.jpg|width=100%]]}}} || || '''본명''' ||임인식[br]林仁植|| || '''필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김철우[br]金鐵友 ---- 성아[br]星兒 ---- 청로[br]靑爐 ---- 쌍수대인[br]雙樹臺人 ---- 양남수 ---- 임다다[br]林DADA ---- 다임다[br]DA林DA||}}}}}} || ||<|2> '''출생''' ||[[1908년]] [[10월 13일]]|| ||[[대한제국]] [[서울특별시|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 현 종로구 동숭동. 자작시 '현해탄 다시 네거리에서' 에서 [[낙산]] 밑 오막살이에 살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2> '''사망''' ||[[1953년]] [[8월 6일]] (향년 44세)|| ||[[북한]] [[평양]]|| || '''직업''' ||시인, 배우, 문학평론가|| || '''배우자''' ||이귀례 ^^(이혼)^^[br][[지하련]] ^^(재혼)^^|| [목차] [clearfix] == 개요 == 임화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인(문학)|시인]], [[배우]], [[문학]] [[평론가]]이다. 본명은 임인식이며 쌍수대인(雙樹臺人), 성아(星兒), 청로(靑爐), 양남수[* 1947년 월북 후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유격대 선동용 문건에 실린 상당수의 글에 서명한 이름. 이 외에도 임다다(林DADA), 다임다(DA林DA)가 있다.] 등 여러 필명을 사용했다. 임화라는 필명은 1927년부터 사용했다. [[다다이즘]] 시인으로 시작해 [[마르크스주의]] 문학 운동을 표방한 단체인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서기장]]까지 지냈고 광복 후 [[월북]]했다가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숙청 때 결국 처형당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인물. == 생애 == [[서울특별시|서울]] 동숭동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유년기 그의 가정은 파산 상태에 있었고, 거기에다가 1926년, 그가 19세 되던 해 어머니가 사망함으로써 그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거리를 전전하기도 했다. 그 해 [[연극]]에 대한 평론을 집필하며 연극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12월 [[카프]]에 가입했다. 그런데 그는 무엇보다도 [[파일:external/img.hani.co.kr/1245405166_6000257372_20090620.jpg]] [[파일:1801_0501.jpg]] 청년 시절 밝고 말끔한 피부에 수려한 외모로 엄청난 미남이었다. 그래서 <유랑> , <혼가>, <지하촌>과 같은 영화에 주연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참고로 <유랑>과 <혼가>는 개봉했으나 모두 흥행에 실패했으며, <지하촌>은 일제의 탄압으로 개봉도 하지 못했다.][* 특히 <혼가>에서는 마부 역할을 맡았는데, 워낙 피부가 흰 데다가 메이크업마저 창백해 보이는 메이크업을 해 하루 종일 햇볕 아래서 일하는 마부와는 거리가 아주 먼 피부색으로 이질감이 두드러졌다. 윤기정은 <혼가>의 임화의 연기력에 대해 "미남자로만 보이려고 화장을 너무 많이 한 것과 동작의 선이 가늘고 표정도 심각한 곳이 없다"고 평가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시 창작과 비평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1927년경부터 계급문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 1929년에 시 〈우리 오빠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 등을 발표하여 대표적인 경향파 시인으로 자리잡으며 [[카프]]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1935년 5월에 카프가 해산한 후에는 잠시 순수 문학으로 회귀하는 듯했지만, [[박헌영]]과 가까워지면서 [[남조선로동당|남로당]] 노선을 걷게 된다. 2번 결혼한 이력이 있다. 첫번째는 이귀례와 결혼했다가 이혼하였고, [[카프]]가 해산한 1935년에 [[마산]]으로 내려가 요양하던 중에 만난 소설가 지하련[* 본명은 이현욱이다.]과 이듬해 재혼하였다.[*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마산용마고등학교]] 뒷쪽의 산호공원 쪽에 지하련이 살던 집이 있다. [[2015년]] [[6월 24일]] [[KIA 타이거즈]]와 [[NC 다이노스]]간의 창원 [[마산 야구장]] 경기 도중 갑자기 연기 때문에 경기가 중단된 사건이 바로 이 집에서 났던 화재 때문이었다. 임화도 이 곳에 잠시 기거하면서 요양했다.] 그러나 해방 후 1947년 11월 [[박헌영]]과 지하련을 따라 월북한 그는 1953년 [[박헌영]]을 필두로 한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계열이 숙청될 때 [[북한]]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 행위 등의 혐의로 기소당했고, 미제의 스파이[* 실제로 CIC([[미 육군]] 속 방첩부대)와 관련이 있다는 기밀 문서가 공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philosophia7&folder=11&list_id=11337431|기사]]도 있다.], 일제에 아첨하거나 결탁한 행위, 반소, 반공 행위 등의 죄목과 함께 [[평양]]에서 총살당했다.[* 이 무렵 같은 계파에 있었던 소설가 안회남도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서, 1954년 이후 안회남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일본]]의 사회파 추리 소설가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 <북의 시인>에서도 임화를 스파이로 보았으나, [[http://blog.naver.com/mklee831?Redirect=Log&logNo=40017296094|이에 반박하는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도 출간되었다.]][* 한창 재판이 진행되던 중 그는 더 이상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견디지 못해 쓰고 있던 안경을 깨서 그 파편으로 자신의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한다. 드라마 <[[제1공화국(드라마)|제1공화국]]>에도 그런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시체는 묻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방치되었다고 알려졌다. 당시 [[만주]]에 피난을 가 있었던 지하련도 다급히 [[평양]]으로 내려와서 울고불며 그의 시신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지하련은 수용소로 끌려갔고, 거기서 병사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로는 남에서나 북에서나 임화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지어|금기시되었다]]. 그도 죽음 앞에서는 나약한 한 명의 인간인지라, 막판에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몇 편 씀으로써 자신을 죄어 오는 죽음의 마수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지만 결국 사형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김일성이 그의 잘생긴 외모를 질투했다고 한다.]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고 다시 서울을 찾은 그는 딸 혜란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후퇴하는 [[북한군]]을 따라 [[자강도]]까지 쫓겨 가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라는 시로 자신의 비애를 달래었다. 그 서정성이 빼어나다 평가되는 시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그의 다른 시 <바람이여 전하라>,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 들과 더불어 북한군 참전 전사들을 모욕하고 [[염전(동음이의어)|염전사상]][* 전후 월북/재북 문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전쟁에 환멸을 느끼는 사상.]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숙청의 도화선이 되었다. 문학사적인 면에서 개화기를 기준으로 한국 문학의 명맥은 완전히 끊겨 껍데기만 남고, 서양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문학이 이식되었다고 하는 이른바 <이식문학론>을 1939~1941년 사이에 제기하였다. 그런데 임화가 월북 문인, 즉 북한 측 인사인 것도 있지만 이 이론은 '''현대 한국 문학을 근본부터 부정하기 때문에''' 학계에선 거의 금기시되는 문학론이다.[* 만약 남로당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해도 민족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하는 1960년대 후반에 그 문학론 때문에 숙청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임화에게 반박하고자 하는 여러 논문과 저술이 많이 나와 있다. [[http://academic.naver.com/mobileView.nhn?doc_id=11166770&ndsCategoryId=6|이식문학론에 대한 비판]] 주로 탈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언급하는 문학론에서 인용되는 편.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11&dir_id=110103&docid=290140&qb=7J6E7ZmULCDrhIgg7Ja064qQIOqzs+yXkCDsnojripDrg5A=&enc=utf8§ion=kin&rank=4&sort=0&spq=0&pid=fxt8lz331yCssbq6dP0ssv--111474&sid=SxB3RHZaEEsAABgCL1M|읽어보자]]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19789&pt=nv|현대사아리랑(상)]]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19828&pt=nv|현대사아리랑(하)]] 참고로 대표적인 이식문학론 킬러가 바로 한국의 전통 문학과 현대 문학이 이어져 있다는 이론에 있어 정말 중요한 위치에 있던 천재 시인 [[정지용]]이다. 연극 평론이나 배우 경력에도 유추할 수 있듯이 영화 비평가로도 활동해서 영화 이론가로도 어느 정도 지분이 있다. 한국 영화사를 배운다면 언급되는 인물로, [[유운성]]이 이식문화론과 연계해 [[봉준호]]의 [[기생충(영화)]] 평론인 [[https://annual-parallax.blogspot.com/2020/06/blog-post.html| 이식과 기생: 봉준호의 <기생충>을 계기로 다시 읽는 임화의 영화론]]라는 평을 쓰기도 했다. 문학과 달리 영화는 '이식문화론'라고 할 수 있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 관점에 따라 자생적인 토양이 있다고도 볼 수 있는 문학과 달리 영화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에서 비롯된 수입된 근대 문화라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한국 영화의 정체성 문제를 언급하면 한번쯤 짚고 넘어가게 되는 인물이다. 월북경력으로 해방이후 대한민국 문학계에선 금기시되는 인물이었으나, 2001년 [[김훈]]이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할때 수상소감에서 임화를 전면적으로 언급하면서 한국 문학계에서 일시적으로 임화의 이름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1/11/06/2001110670191.html|김훈의 소상소감]] [[분류:한국의 시인]][[분류:북한의 작가]][[분류:1908년 출생]][[분류:1953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월북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