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일본계 페루인]] [include(틀:일본 관련 문서)] [목차] == 개요 == 오랫동안 [[페루]]의 [[일본계]] 인구는 8만명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이 조사는 수십 년 전에 행해진 것으로, 게다가 당시 페루 국외에 사는 일본계 페루인은 조사 대상이 되지 않았고, 일본인과 다른 나라나 지역에 뿌리를 가진 사람 과 혼혈 사람들은별로 계산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과 그 후의 [[일본인]]의 인구 증가를 감안하면, 현재의 일본계 인구는 수십만에 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 이민사 == [[일본인]]의 [[페루]] 거주 기록은 [[1614년]] [[리마]] 인구조사 20명이다.또 [[1608년]](게이초 1213년)에 쓰인 공증 유언장에는 일본인 미겔 데 실바(MIGUEL DE SILVA)라는 이름이 보인다.실바는 통칭이며 해당 유언장에는 일본 국적이 명기돼 있다. 페루 [[독립]] 때 [[1821년]] 호세 데 생=마르틴은 독립선언에서 노예제의 단계적 폐지(새로 태어나는 노예의 자녀의 자유)를 선언했고 생=마르틴으로부터 독립전쟁 주도권을 물려받은 시몬 볼리바르도 이를 승인하는 입장이었으나 볼리바르가 페루를 떠난 뒤 과두지배층과 대농원주의 저항 때문에 실제 노예제 폐지는 1854년으로 늦춰졌다.1854년 라몬 카스티야가 노예제도를 폐지하자 페루 태평양변('코스타')의 대농원주들은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고 흑인 노예의 대체로 유럽 국가로부터의 이민을 도입하기 시작했지만 라틴 아메리카로 향하는 유럽인들 중 상당수는 당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던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제국으로 향했기 때문에 페루에 정착한 유럽인은 극히 드물었다.그 결과 페루의 과두지배층은 아시아로부터의 이민을 요구했고, 1849년 태평양 변('코스타')의 농장 대농원에서의 노동력을 위해 대청제국으로부터 중국인 농업노동자 도입이 의회에서 결의되었다.이로써 후술하는 마리아 루스호 사건과 같은 문제를 일으킨 쿨리(고력) 무역이 시작되면서 25년간 10만여 명의 중국인이 페루로 유입돼 식사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후 페루와 일본은 [[1873년]](메이지 6년) [[8월]]에 일비수교통상항해가조약을 체결했다.이는 마리아 루스호 사건을 계기로 양국이 접촉한 것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조약 협상이 야기된 것이며 남미 국가 중 일본과 국교를 수립한 최초의 나라는 페루였다. 또한 이 무렵 이미 페루에는 [[태평양]]을 표류하던 중 외국선에 구조되어 1842년 페루 카야오항으로 끌려온 오와리 국 출신의 나가요시, 쥬사쿠, 카메요시, 이스케 등 일본인 4명이 살고 있었다.4명 중 나가요시는 1860년경 페루를 떠나 청국을 경유해 귀국했으나 쥬사쿠, 카메요시, 이스케 등 3명은 페루에 남았고 이스케는 1877년(메이지 10년) 고향인 아이치 현 지타 반도의 마을에 편지를 보냈다. 1874년 쿨리 무역은 폐지됐지만 이후에도 페루 태평양변(코스타)의 대농원주들은 더 많은 노동력을 요구했다.이로써 1898년(메이지 31년) 일본 이민회사인 모리오카상회가 다나카 사다요시를 대리인으로 페루에 파견하고, 다음해 1899년(메이지 32년) 모리오카상회를 중개역으로 하여 일본인들의 페루 집단이민이 시작되었다.790명의 일본인이 페루로의 첫 이민선인 사쿠라마루호를 타고 요코하마항에서 태평양을 건너 같은 해 4월 3일 페루 수도 리마에 인접한 카야오항에 도착했다.이것은 남미로의 집단 이민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주하는 승객의 내역은 니가타·야마구치·히로시마의 출신자가 많았다(후속 이민에서는 오키나와나 규슈 각 현의 출신자가 증가해 간다). 그러나, 이주 후의 일본인에게는 태평양을 따라 있는 대농원에서의 말이 통하지 않는 것에 의한 다른 나라로부터의 노동자와의 엇갈림이나 일하는 방식이나 생활 습관의 차이 외에, 중노동이나 농원주에 의한 잇따른 임금 체불등의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부터, 이주자의 약 40%가 정착으로부터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모리오카 상회의 지점이 있는 카야오항으로 돌아오는 사태가 일어났다.또 말라리아와 티푸스 등 풍토병에 시달리게 돼 카사블랑카 경지에서는 정착 직후부터 환자가 속출, 5~6월 사이 4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7월에는 노동에 종사할 수 있는 상태였던 사람은 226명 중 30명에 불과했다.풍토병과 과로 사망자는 정착 후 약 1년 반 뒤인 1900년 10월 사이에 124명까지 불어났다. 이 때문에 이주자들은 일본 외무성 앞으로 궁상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고 외무성은 노다 요시하루 주멕시코 공사관 서기생을 재리마 영사관에 붙여 노다에 각지의 정착촌 조사를 받게 했다.그 결과 이주자와 농장주 측의 갈등이 예상보다 심각한 것으로 판명됐고 노다는 이주자 전원 귀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하지만 700명 가까운 이주자를 귀국시킬 만한 배가 없어 고육지책으로 농장주 측에 처우 개선을 계속 요구하고 이주자들에게도 지금 상황을 견디도록 설득하겠다는 수단으로 나왔다.그 결과 농장주 측도 처우 개선에 나선 데다 이주자들도 페루의 기후와 풍토에 익숙해지면서 갈등은 종식됐다.이런 가운데 페루 이민은 계속돼 1923년(다이쇼 12년) 이민계약이 폐지될 때까지 17.764명의 일본인이 페루로 이주하게 됐다. 현지 축재에 성공한 이주자들은 리마 수도권에 집중해 이발사와 잡화점을 운영했다.당초 일본계인은 페루 사회로부터의 신용이 없었기 때문에 은행으로부터의 융자를 받지 못했고,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 일본계인끼리의 요리 모자강이 정비되었다.1917년에는 페루 중앙일본인회가 결성되고 1920년에는 리마 일본인학교가 창설되는 등 점차 일본계인의 조직화도 진행되었으나 특정 직종에 집중되면서 페루 거주를 일시적인 소득으로 파악하여 수입의 상당 부분을 일본에 송금하고 일본계인끼리 뭉쳐 현지 주민과 교류할 기회가 적었던 일본계인들은 페루 사회에서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런 사정과 함께 1930년대 들어 만주사변 등의 영향으로 미일관계가 악화되자 그에 따라 친미적인 페루 정부와 과두지배층에도 일본계 사회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반일감정은 일본계 인내에서의 트러블이 발단이 된 후루야 사건에 의해 일거에 고조되어 1940년 5월 13일부터 14일까지의 리마 배일폭동사건이 발생해, 일본계인이 경영하는 상점이 차례차례 습격당했고, 그 결과 216명의 일본계인이 일본으로의 귀국을 선택했다[5].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에 의해 태평양전쟁이 개전되자 페루 정부는 일본계인 집회 금지와 일본어 신문 발행 금지, 일본계인 자산 동결 조치와 함께 미국의 요청에 따라 약 2,000명의 일본계인을 북미 강제수용소로 보냈다(일본계인 강제수용).중남미의 일본인 이민은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 직후부터 당사국인 친미정권에 의해 차례차례 체포되어 미국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으나 중남미에서 미국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일본계인 대부분이 페루 출신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브라질 일본계 사회와 마찬가지로 페루에서도 승조와 패조의 항쟁이 벌어졌다.그러던 중 1950년 태평양 클럽이 결성되었고 1955년 페루 중앙 일본인회가 부활하였다.이후 페루 중앙일본인회는 1984년 페루 일본계인협회로 발전 해소했다. 1990년 기존 정당에 대한 실망으로 기존 세력과의 관계가 없는 치노(원래는 중국인의 뜻이지만 페루에서는 동양인이나 한 겹의 사람 전반을 나타내는 표현)임을 주창한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이끈 변혁 90이 대선에서 승리해 후지모리는 대통령이 됐다.후지모리는 '후히 쇼크'라 불리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테러조직 센데로 루미노소를 괴멸로 몰아냄으로써 알란 가르시아가 기울인 페루 사회를 바로 세웠다. == 언어 == 3세 이후의 일본계인의 [[일본어]] 능력은 높지 않고, 많은 일본계 페루인은 주로 [[스페인어]]를 말한다. == 이주 == 페루 경제의 긴 정체로 인해 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미국으로 노동이주(일본에는 "Dekasegui")를 한 사람이 많다. 2012년 12월 31일 현재 일본에서는 49.483명의 페루 국적자가 재류 외국인이 되고 있다. 그것은 일본 국내에서는 브라질(브라질 국적은 193,571명)에 이어 라틴 아메리카 제2의 체류 인구이다. 헤세이 22년 시점에서 일본 영주자도 3만명을 넘고 있다. 페루는 최근 몇 년 동안 이득의 발송 국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1980년대의 인플레이션이나 장기간의 불황, 거기에 따른 고실업률이나 좌익 게릴라의 테러 등에 의해, 많은 페루인이 안정된 일을 요구해 미국을 비롯해 스페인이나 아르헨티나 등에 이민하고 있다(해외에 거주해 하는 페루 사람은 총 200만명을 넘는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에도 1990년의 입관법 개정을 계기로 많은 일본인이 페루보다 오게 되었다. 합계 10만명으로 여겨지고 있는 페루 일본계 사회의 그 절반이(2011년 12월 현재 52.842명의 등록자)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숫자는 의문시되고 있지만, 이유로 많은 '위장일계인'으로 일본에 입국한 사람의 일부가 '재류특별허가'라는 절차에 따라 정규비자를 취득한 경우와 일본계 페루인 하지만 일본에서 출생한 자제(연간 평균 500명)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유명 인물 == * [[게이코 후지모리]] * [[알베르토 후지모리]] * 에릭 후쿠사키 : 친가 쪽으로 일본계 3세로, 성인이 될 무렵 일본으로 돌아와 싱어송라이터 생활을 하고 있다. 라틴 풍의 음악을 일본어 가사로 부르는 것이 특징. 한때 [[업프론트 프로모션]]에 있으면서 [[Juice=Juice]]에게 [[Fiesta! Fiesta!]]를 써 주기도 했다. == 관련 문서 == * [[일본인]] * [[페루-일본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