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인종익}}}'''[br]'''印宗益'''}}}}}} || || '''자''' ||원우(元友) || || '''본관''' ||[[교동 인씨]][* 직무공파(直武公派) 56세 종(宗) 항렬.] || ||<|2> '''출생''' ||[[1871년]] [[2월 28일]] || ||[[한성부]] 북부 안국방 안국동계[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종로구)|화동]] 125번지) || ||<|2> '''사망''' ||몰년 미상 || ||사망지 미상 || || '''종교''' ||[[천도교]]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3.1 운동]] 당시 [[전라북도]] [[전주시|전주군]]과 [[충청북도]] [[청주시|청주군]]에서 조선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71년 2월 28일 한성부 북부 안국방 안국동계(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125번지)에서 아버지 인영환(印永煥, 1827. 10. 13 ~ 1877. 11. 5)과 어머니 [[해주 최씨]](1827. 5. 29 ~ 1890. 5. 20)[* 최봉조(崔鳳朝)의 딸이다.]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수송동(종로구)|수송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종로구)|수송동]]) 60번지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5478&evntdowngbn=Y&indpnId=000000762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이주했다]]. 일찍이 [[천도교]]에 입교해 천도교 종단에서 경영하던 인쇄소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23&docId=576670&categoryId=46623|보성사]](普成社)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했으며, 이때 천도교 종단 기관지인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의 월보과장이었던 [[이종일]]은 보성사의 활판계장으로도 재직 중이었다. 1919년 2월 28일 이종일로부터 [[3.1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목적으로 앞서 인쇄한 [[기미독립선언서]] 2000여 매를 [[전라북도]] [[전주시|전주군]]의 천도교구실과 [[충청북도]] [[청주시|청주군]]에 전달, 배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곧바로 [[경기도]] [[경성부]]를 떠나 3월 1일 전라북도 전주군에 도착했고, 곧 전주면 읍내 천도교구실에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6063|김진옥]](金振玉)·배상근(裵祥根)을 만나 가지고 있던 기미독립선언서 중 1,700여 매를 전달하였고 이를 사람의 통행이 많은 곳에 배포하도록 당부하였다. 김진옥은 이후 전주군 천도교구장 한영태(韓永泰)를 비롯해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6238|민영진]](閔泳軫)·조성덕(趙聖德)·김성문(金成文)·[[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61|김영호]](金永浩) 등에게 부탁하여 전주면 읍내에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하도록 하였다. 이어 3월 2일 충청북도 청주군에 도착한 뒤에는 직접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하려고 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청주경찰서에 구금되고 말았다. 그 뒤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5478&evntdowngbn=Y&indpnId=000000762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고]],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같은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 본형에 산입)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5949&evntdowngbn=Y&indpnId=0000008074&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였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미결 구류일수 중 6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71&evntId=0034972272&evntdowngbn=Y&indpnId=000000462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공소가 기각되었고]], 이에 상고했으나 1920년 4월 8일 같은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6203&evntdowngbn=Y&indpnId=000000831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의 행적 및 사망년월일, 사망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미비해 알 수 없다. 201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교동 인씨]][[분류:1871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일제강점기의 천도교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