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조선 왕비)] ---- ||<#bf14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인성왕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조선 왕세자빈)] ---- [include(틀:역대 조선 왕대비)]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조선 인종의 왕비[br]{{{+1 인성왕후 | 仁聖王后}}}'''}}}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min-height: 31px" {{{#!folding [ 존호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명종 · 선조조 왕대비[br]{{{+1 공의왕대비 | 恭懿王大妃}}}'''}}} || }}}}}}}}}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인종효릉.jpg|width=100%]]}}} || ||<-2> {{{#ffd400 {{{-2 효릉 전경}}} }}} || ||<|2> '''출생''' ||[[1514년]] [[10월 28일]]^^([[음력]] [[10월 1일]])^^ || ||[[조선]] [[한성부]][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2> '''사망''' ||[[1578년]] [[1월 16일]][br]{{{-1 ([[음력]] [[1547년]] [[11월 29일]]) (향년 63세)}}} || ||[[조선]] [[한성부]] [[경복궁]] [[경복궁 교태전|공의전]][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 || '''능묘''' ||[[서삼릉#s-2.2|효릉]](孝陵) || ||<|6> '''재위기간''' ||'''{{{#ffd400 조선 왕세자빈}}}''' || ||[[1524년]] [[4월 19일]] ~ [[1544년]] [[12월 14일]] || ||'''{{{#ffd400 조선 왕비}}}''' || ||[[1544년]] [[12월 14일]] ~ [[1545년]] [[8월 17일]] || ||'''{{{#ffd400 조선 왕대비}}}''' || ||[[1545년]] [[8월 17일]] ~ [[1578년]] [[1월 16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반남 박씨]] || || '''부모''' ||부친 금성부원군 박용 (錦城府院君 朴墉, {{{-3 1468 ~ 1524}}}) 모친 문소부부인 [[의성 김씨]] (聞韶府夫人 義城 金氏, {{{-3 1490 ~ 1550}}}) || || '''형제자매''' ||2남 2녀 중 장녀[* 인성왕후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다 서출이다.] || || '''배우자''' ||[[인종(조선)|인종]]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 '''전호''' ||효모전(孝慕殿) || || '''존호''' ||'''공의(恭懿)''' || || '''휘호''' ||효순(孝順) || || '''시호''' ||'''인성왕후(仁聖王后)'''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12대 [[인종(조선)|인종]]의 [[왕비]].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 == 생애 == [[1514년]](중종 9년)에 금성부원군 박용과 문소부부인 [[의성 김씨|김씨]]의 딸로 태어났다. [[1524년]](중종 19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인종(조선)|인종]]이 [[1544년]](중종 39년)에 즉위하면서 정식 [[왕비]]가 되었다. 1년 뒤인 [[1545년]](인종 2년)에 남편 [[인종(조선)|인종]]이 짧은 재위 끝에 갑작스럽게 [[죽음|승하]]하자 [[인종(조선)|인종]]의 이복 아우인 [[명종(조선)|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대비로 올라갔으며, 2년 뒤인 1547년에 공의(恭懿)의 존호를 받아 공의 왕대비가 되었다. [[1567년]](명종 22년), [[명종(조선)|명종]]이 [[조선/왕사|후사]][* 후사는 원래 [[순회세자]]가 있었으나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없었다.] 없이 [[죽음|승하]]하면서 [[중종(조선)|중종]]의 서손인 [[선조(조선)|선조]]가 [[명종(조선)|명종]]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되면서 즉위하였다. 그런데 이미 대왕대비의 자리가 비어있었음에도 대왕대비로 승봉(昇奉)되지 못하였으며, 아래 동서이자 [[선조(조선)|선조]]의 [[양모#s-2|양모]]인 [[인순왕후]]가 선조의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그 이유는 선조가 [[명종(조선)|명종]]과 [[인순왕후]] 슬하로 입적된 [[조선/왕사|사왕]](嗣王)이었기 때문이다. [[인종(조선)|인종]]의 [[조선/왕사|직계]]가 단절되고 [[명종(조선)|명종]]의 [[조선/왕사|직계]]가 [[조선/왕실|왕실]]의 적통을 잇게 되면서 [[인순왕후]]가 [[인성왕후]]보다 [[수렴청정]]의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종(조선)|인종]]과 [[명종(조선)|명종]]은 [[중종(조선)|중종]]의 적통 아들들로 [[조선/왕사|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인성왕후]]를 대왕대비로 올리는 것은 며느리인 대비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대왕대비로 승봉되었던 [[정희왕후]]나 [[소혜왕후]]와 같은 경우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지병으로 [[천식]]과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실록에 의하면 사망 2년 전부터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심해져서 [[궁녀]]들이 그녀를 방석에 앉힌 채로 들고 자리를 이동시켜 주었다고 한다.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노쇠했던 탓에 결국 [[1577년]](선조 10년), 65세를 일기로 [[죽음|승하]]하였다. == 평가 == 온화한 [[왕비]]였지만 [[인종(조선)|남편]]을 일찍 잃고 자식도 없었던 탓에 외롭게 살았다. 본인은 물론 남편인 [[인종(조선)|인종]]도 성격이 너무 착할 뿐만 아니라 [[효자]]였기 때문에 남편 [[인종(조선)|인종]]을 [[왕세자|세자]] 때부터 힘들게 했던 시어머니인 [[문정왕후]]를 극진히 모셨다고 하며, [[문정왕후]]도 이는 인정했는지 인종 사후 [[윤임|인종의 외가]]를 숙청하면서 인성왕후나 인성왕후의 [[반남 박씨|친정]]은 건드리지 않았다. 물론 인성왕후가 자식이 없었던 탓에 [[명종(조선)|자기 아들]]을 [[조선/왕사|왕위]]에 올리려는 야심을 품은 [[문정왕후]]와 맞설 입장이 아니었으니 굳이 [[숙청]]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인성왕후의 친정과 반남 박씨 가문도 엄연히 명문가이다. 아무리 힘이 쎈 왕이라도 아무런 명분도 없이 본인에게 거슬린다는 이유로 명문가를 숙청하는것은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차라리 자기 편에 알아서 기거나 가만히 있도록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시어머니인 [[문정왕후]]가 [[1565년]](명종 20년)에 사망한 지 2년 지나고 시동생 [[명종(조선)|명종]]도 사망하고 시손자 하성군이 [[선조(조선)|선조]]로 즉위했는데, 3년 지나고 나서 조카며느리뻘이자 [[반남 박씨|같은 집안]][* 인성왕후의 증조부와 [[의인왕후]]의 6대조가 형제다. 친가쪽에서는 인성왕후에게 의인왕후는 증손녀뻘이다.]인 [[의인왕후]]가 [[선조(조선)|선조]]의 [[왕비]]가 되자 [[인순왕후]]와 함께 [[선조(조선)|선조]]의 비인 그녀를 예뻐했다. 워낙 [[의인왕후]]의 인물됨이 괜찮았기 때문에 두 대비들이 유독 예뻐했을 가능성이 높다. 죽기 직전에는 [[을사사화]]의 위훈 삭제 문제로 대단히 고통스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을사사화]]의 공신들을 인정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정통 후계자 [[명종(조선)|명종]]을 즉위시킨 공'인데, 이는 거꾸로 말하면 [[명종(조선)|명종]]이 즉위할 당시 '누군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공신들이 명종을 즉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되면 실제 인성왕후가 권력을 쥐지 않았고 권력 욕심도 없었던 현실과는 별개로, [[조선/왕실|왕실]]에서 [[명종(조선)|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 다음 서열이며 [[죽음|승하]]한 [[인종(조선)|인종]]의 [[왕비]]였던 인성왕후가 [[명종(조선)|명종]]의 즉위를 방해한 그 '누군가'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을사사화]]로 공신이 된 사람들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한, 인성왕후는 계속 '정당한 [[조선/왕사|왕위 계승자]]의 즉위를 방해한 인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인성왕후 본인은 정치적 실권이나 영향력이 없었으므로 본인이 위훈삭제를 직접 요구할 수는 없었고 그만큼 괴로움은 더 컸다. 하지만 위훈삭제 문제는 상당히 [[조선/왕사|정통성]]에 있어 민감한 부분이라 당대 임금인 [[선조(조선)|선조]]도 함부로 손댈 수 없었다. 자칫하면 공신의 위훈 삭제 문제로 터진 [[기묘사화]]와 비슷한 일이 터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 위훈삭제 문제는 [[명종(조선)|명종]]의 [[조선/왕사|정통성]] 문제와 연결되는데, [[선조(조선)|선조]] 본인도 [[명종(조선)|명종]]의 [[양자(가족)|양자]] 자격으로 [[조선/왕사|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넓게 보면 [[선조(조선)|선조]] 본인의 [[조선/왕사|정통성]]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었다. 그래서 병석에 누운 인성왕후의 하소연을 들은 뒤 '어쩌다 [[조선/왕사|임금]]이 되어서 이런 난처한 일을 겪게 되었구나'라며 탄식했을 정도. 결국 [[선조(조선)|선조]]는 인성왕후가 [[죽음|승하]]하기 직전에 결단을 내려 위훈삭제를 명하였다. ||[[1545년|을사년]](乙巳年)의 공신을 삭제하고, [[윤임]](尹任) 【찬성】 ·유 【계림군】 등의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명하였다. 이때 대비(인성왕후)의 병이 계속 낫지 않았는데도 궁인들이 대부분 [[을사사화|을사]]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계레 붙이들이었으므로, 대비가 그 공신을 삭제하려는 것을 원망하여 언제나 [[선조(조선)|상]](上)의 앞에서 대비의 증세가 심할 정도로 이르지 않았다고 아뢰었다. 하루는 [[선조(조선)|상]](上)이 문안한 뒤에 그대로 나아가 뵙고서 '녹훈(錄勳)한 것은 바로 [[명종(조선)|선조]](先祖)에서 한 지극히 중대한 일이므로 감히 가벼이 고치지 못합니다. 외정(外廷)의 의논을 따르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니, 대비가 '견딜 수 없다(不堪)' 고 잇따라 부르짖으면서, '국가의 큰 일을 어찌 미망인(未亡人)을 위해서 가벼이 고칠 수 있겠소.’ 하였다. [[선조(조선)|상]]이 물러나서 계단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대비가 소리를 내어 통곡하니, 상이 듣고 자리를 가져다가 계단 아래에 앉아 머리를 떨군 채 한동안 있다가 늙은 [[궁녀|궁인]]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사가에 있으면서 녹봉을 받아 먹으면 일생을 편안히 보낼 터인데 불행스럽게도 [[조선/왕사|여기]]에 이르러 난처한 일을 만났다.' 하였다. 며칠 후에 대비의 병이 위독해졌는데 대비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는 [[저승|지하]](地下)에서도 [[처벌|죄명]](罪名)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고, 말을 마치자 손발이 모두 싸늘해졌다. [[궁녀|궁인]]이 [[선조(조선)|상]]에게 달려가 보고하니 상이 즉시 나아가 뵈었으나 이미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의인왕후|중전]]도 와서 서로 대하여 울었다. 상이 대비에게 아뢰기를, '녹훈을 삭제할 것이니 안심하고 병을 조리하소서.' 하니, 대비가 기쁜 빛을 나타냈는데, 눈이 저절로 감겼다. 상이 물러가자 다시 깨어나서 사람을 보내어 [[선조(조선)|상]]에게 사례하기를, '상의 은혜가 망극하여 보답할 바를 알지 못하겠소.' 하였다. 다음날 대비가 [[죽음|승하]]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11권, 선조 10년([[1577년|1577]], 명 만력(萬曆) 5년) 11월 1일, 계축 1번째기사.|| == 가계 == * '''친정([[반남 박씨]])''' * 아버지 :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 * 어머니 : 문소부부인 [[의성 김씨|김씨]](聞韶府夫人 金氏) * '''시가([[조선/왕실|전주 이씨]])''' * '''시조부 : [[성종(조선)|성종]](成宗) 이혈(李娎)''' * 시조모 : [[정현왕후]] [[파평 윤씨|윤씨]](貞顯王后 尹氏) * '''시아버지 : [[중종(조선)|중종]](中宗) 이역(李懌)''' * 시어머니 : [[장경왕후]] [[파평 윤씨]](章敬王后 尹氏) * 배우자 / 자녀 * '''남편 : [[인종(조선)|인종]](仁宗) 이호(李峼)''' * 자녀 : '슬하에 자녀 없음' == 대중매체에서 == [[인종(조선)|인종]]이 대중매체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적이 거의 없었고 인성왕후도 [[존재감]]이 없을 뿐더러 설령 나온다 해도 비중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 그나마 여인천하에서는 비중이 좀 많은데 이것도 해당 사극 내용 특성상 문정왕후가 주역인지라 인성왕후를 안 등장시킬 수도, 비중을 공기 수준으로 만들 수는 없었기에 많을 수 있던 것.] [[역사]]대로 착하고 인자하게 묘사된다. || [[파일:풍란 인성왕후.png|width=100%]] || || 《풍란》에서의 인성왕후 || * 1985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풍란(드라마)|풍란]]에서는 배우 채유미가 연기했다. || [[파일:여인천하 인성왕후.png|width=100%]] || || 《여인천하》에서의 인성왕후 || *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배우 [[신은정]]이 연기했다. == 참고 문서 == * [[경복궁]] * [[명종(조선)|명종]] * [[명종실록]] * [[문정왕후]] * [[선조(조선)|선조]] *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 [[윤임]] * [[인순왕후]] * [[인종(조선)|인종]] * [[인종실록]] * [[의인왕후]] * [[을사사화]] * [[중종(조선)|중종]] * [[중종실록]] * [[서삼릉|효릉]] [[분류:조선의 왕비]][[분류:반남 박씨]][[분류:1514년 출생]][[분류:157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