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 ||<-3> {{{-1 {{{#ffd700 '''조선의 별궁'''}}}}}}[br]{{{+1 {{{#ffd700 '''인덕궁'''}}}}}}'''[br]'''{{{#ffd700 '''仁德宮'''}}} || ||<-2> '''설립시기''' || 1401년 || ||<-2> '''해체시기''' || 1419년 이후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2대 왕 [[정종(조선)|정종]]이 [[태상황|상왕]]으로 물러난 뒤 살던 [[궁전|별궁]]. 그래서 정종을 일컫는 [[궁호]]이기도 했다. == 역사 == 1400년 [[정종(조선)|정종]]이 [[태종(조선)|태종]]에게 양위한 뒤, 1401년 당시 [[수도(행정구역)|수도]]였던 [[개성시|개경]]에 처음 지었다.[* 1394년 지금의 [[서울특별시|서울]]인 [[한성부]]로 [[천도]]했으나 1399년 정종이 다시 [[개성시|개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1405년 [[태종(조선)|태종]]이 다시 [[한성부|한성]]으로 돌아가면서 옮겨 다시 건립했다. [[위치]]는 지금의 [[경희궁]]과 [[사직단]] 사이 언저리인 듯 하다.[* 당시에는 경희궁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경희궁 경내에 해당될 가능성도 있다.] 1412년 [[정종(조선)|정종]]의 왕비 [[정안왕후|정안왕후 김씨]]가, 그리고 1419년 정종이 이 곳에서 [[죽음|승하]]했으며 정종의 빈전과 혼전을 인덕궁에 두었다. 이후 관련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 기타 == * [[태종(조선)|태종]] 시절 안하무인으로 권세를 누린 [[이숙번]]에게 피해를 입기도 했다. 1413년에 [[풍수]]가 최양선이 서쪽 대문인 [[돈의문]]의 [[자리]]가 안좋다고 주장해 돈의문을 폐쇄했다. 대신 새로 통행할 수 있는 [[문]]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숙번의 [[집]] 앞이 좋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당연히 자기 집 앞이 시끄러워질 것을 꺼린 이숙번이 [[반어법|친절하게도]] '''"인덕궁 앞 동네에 문 세우죠."'''라고 했다. 당시 그의 권세가 대단했기에 [[조정]]은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이 때 세운 문이 서전문(西箭門). 여기서 내 집 앞이 조용하자고 [[상왕]] 집 앞이 시끄러워도 상관없다는 막무가내인 그의 [[태도]]와, 저럴 정도로 [[권력]]이 굉장히 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태종이 이를 묵과했던 건 이숙번의 능력과 공훈도 있지만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면 정종의 권위를 낮춰야하는 점도 있어서 결국 이숙번의 뜻대로 됐으나 사적으로는 정종과 화목했던만큼 이때부터 태종은 이숙번을 숙청 대상으로 찍어뒀을 걸로 보인다. [br][br]결국 이숙번이 실각하고 [[세종(조선)|세종]]이 즉위한 후에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오늘날 [[강북삼성병원]] 앞 [[정동]] [[사거리]] [[자리]]에 새롭게 문을 세운 뒤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그 문이 바로 우리가 아는 그 돈의문이다. 돈의문은 1915년에 헐리고 현재는 [[도로]]가 들어서있다. * 1418년 이후 [[태종(조선)|태종]]이 인덕궁에 들어갈 때는 [[숭례문]]을 지나 서전문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도 서전문으로 나와 숭례문을 통해 돌아갔다고 한다. 왕궁과 인덕궁 둘 다 같은 [[한양도성]] 안에 있는데 굳이 저랬던 데에는 가슴아픈 사연이 있다. 1418년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 일찍 죽었는데 그의 집이 인덕궁 가는 길에 있어 가다가 보게 되면 [[참척|슬퍼지기 때문이었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돈의문, version=73, paragraph=3)]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분류:정종(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