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인건}}}'''[br]'''印鍵'''}}}}}} || || '''자''' ||갑성(甲成) || || '''본관''' ||[[교동 인씨]][* 선교랑공파(宣敎郞公派) 62세 金변 항렬.] || ||<|2> '''출생''' ||[[1894년]] [[9월 16일]] || ||[[황해도]] [[봉산군]] 감당면 녹탄동[* 1914년 봉산군 덕재면 대화리와 평산군 상월면 동막리·사탄리로 분리 개편 → 평산군 상월면 사탄리 219번지 → 현재 황해북도 인산군 동사리·석련리][* [[교동 인씨]] 집성촌이다.][br](現 [[황해북도]] [[린산군]] 동사리·석련리) || || '''사망''' ||[[1960년]] [[7월 17일]][* 교동 인씨 인터넷족보에는 7월 18일에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향년 65세) || || '''묘소''' ||[[대전광역시]] [[서구(대전)|서구]] [[갈마동]]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94년 9월 16일 황해도 봉산군 감당면 녹탄동(現 황해북도 린산군 동사리·석련리)에서 아버지 인월황(印月璜, 1871. 4. 13 ~ ?)[* 이후 인월기(印月琦)로 개명하였다.]과 어머니 [[조(성씨)|배천 조씨]](白川 趙氏, 1864. 8. 5 ~ ?)[* 조두련(趙斗連)의 딸이다.] 사이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어느 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뜻을 세웠다. 그러다가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연해주]]로 건너가 연해주와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국제정세를 주시하던 중, 조선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에서 활동할 뜻을 세우고 1920년에 귀국하였다. 귀향 후 그는 고향인 황해도 평산군에서 평산청년회(平山靑年會)를 주도하여 조직하였고, 1920년 12월 2일 조선청년회연합회가 결성될 때 평산청년회의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여, [[주기철]] 등과 함께 의사부(議事部) 임원에 [[http://db.history.go.kr/id/hdsr_009_0020_0020_0020|선출되었다]]. 조선청년회연합회는 비록 일제의 허가를 받아 창립된 합법적인 등록단체였지만, 창립 당시 전국 각지에서 116개 청년단체 대표자 124명이 참석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3.1 운동 이후 분산된 청년단체의 역량을 결집시켜 민족의식을 제고하고 청년운동을 대중화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이같은 청년회를 중심으로 표면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면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되어 연통부(聯通府)의 평산군 군감부(郡監府) 산하 면사감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7월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으로 세워진 연통부는 독립운동자금모집 및 임시정부의 선전, 민족의식의 고취, 독립운동세력의 규합 등을 주요 활동지침으로 정하였다. 이렇게 연통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연통부의 조직이 발각되는 것과 더불어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21년 10월 11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2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12월 출옥 후 그는 무장투쟁에 투신하고자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군에 입대하였다. 러시아 군대에서 훈련을 수료한 뒤 1924년 5월 31일 중국 관내로 건너갔으며, [[윈난성]] [[쿤밍시]] 윈난부성(雲南府城) 사묘가(士廟街) 15호 생활미술사에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남사관학교(雲南士官學校)에 입학하여 1927년 졸업하고 [[하사]]에 임관했다.[[http://db.history.go.kr/id/im_108_11084|#]] 그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대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국민혁명군]]에 편입되어 1943년 장교로 [[광둥성]]에서 활동 중, [[일본 제국 육군]] 특무대에 붙잡혀 국내로 이송되어 연금생활을 하였다. 연금생활을 지속하던 중 [[8.15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에 임관되어 1952년 초대 [[대전충남지방병무청|충남병사구 사령부]] 사령관(現 [[대전충남지방병무청]]장)을 지내고 이후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1960년 7월 17일에 죽었다. 사후 199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교동 인씨]][[분류:평산군 출신 인물]][[분류:1894년 출생]][[분류:1960년 사망]][[분류:장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