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현우}}}'''[br]'''李鉉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12&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2046&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집행원부]]에는 李鉉'''{{{+1 佑}}}'''로 등재돼 있다.]'''}}}}}} || || '''자''' ||길지(吉之) || || '''본관''' ||[[재령 이씨]][* 영해파(寧海派)-석계공파(石溪公派)-평재공파(平齋公派) 23세 현(鉉) 항렬.] || ||<|2> '''출생''' ||[[1894년]] [[1월 9일]] || ||[[경상도]] [[영덕군|영해도호부]] 서면 신리[br](現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350번지) || || '''사망''' ||[[1925년]] [[4월 29일]][* [[음력]] [[4월 7일]].] (향년 31세) || || '''묘소'''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894년 1월 9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서면 신리(現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350번지)에서 아버지 이수발(李壽潑, 1858 ~ ?)과 어머니 [[진성 이씨]][*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이만정(李晩政)의 딸이다.]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창수면 오촌동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59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7840&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거주하다가]] 인량동으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60&evntId=0034987825&evntdowngbn=Y&indpnId=000001910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이주했다]]. 1919년 3월 18일, 19촌 지간의 족숙(族叔) [[이수각(1872)|이수각]], 20촌 지간의 족제(族弟) [[이현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673|권재형]](權在衡) 등과 함께 [[영해면]] 성내동 시장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미리 제작한 대형, 중형, 소형의 [[태극기]]를 지참해 영해면으로 가던 도중, 창수동 주민들 중에 일제의 도로공사로 인해 논밭을 강제로 수탈당한 농민이 많다는 점을 들어 창수동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시위대의 수는 곧 150여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현우는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고, 그날 오후 4시 창수면 헌병주재소에 이르자 이때의 시위군중은 4백여명이었다.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과 서류를 파기한 후 창수면 객사 및 주임순사 [[다카기]] 이사부로(高木伊三郞)[* 1907년 8월 [[http://db.history.go.kr/id/gbtg_1907_10_02_b00001_00010|이사청]](理事廳) [[순사]]를 역임했고, 1919년 6월 14일 영덕경찰서 순사로서 경상북도경찰부장으로부터 순사정근증서를 [[http://db.history.go.kr/id/gb_1919_07_04_a20690_0200|몰수당했다]].]의 숙소와 소유물, 조선인 순사보 송상구(宋相九)·권찬규(權燦奎) 등의 비품을 파괴하고 제복과 제모를 빼앗았다. 또한 장총 3정과 대검 2개를 탈취하여 파기한 후 일본인 순사의 가구·의류·식기까지도 완전히 파기하고, 영해공립보통학교(現 영해초등학교)로 가서 교사 및 학생들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오후 7시에 이르러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본 제국 경찰]]의 대대적인 검속 때 체포되었고,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소요죄|소요]]·[[공무집행방해]]·건조물 손괴·기물 손괴·공문서 훼기·[[상해죄|상해]]·보안법 위반·[[주거침입]] 등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60&evntId=0034987825&evntdowngbn=Y&indpnId=000001910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문의 여독으로 고통받다가 1925년 4월 29일 3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영덕군 출신 인물]][[분류:재령 이씨]][[분류:1894년 출생]][[분류:1925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