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 ||<-3> {{{-1 {{{#ffd700 '''조선의 별궁'''}}}}}}[br]{{{+1 {{{#ffd700 '''이현궁'''}}}}}}'''[br]'''{{{#ffd700 '''梨峴宮'''}}}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인의빌딩, 너비=100%, 높이=100%)]}}} || ||<-2> '''위치''' || [[한성부]] 동부 연화방[br]{{{-1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br]김상옥로, 종로31길 언저리)[* 구 지번주소 종로구 인의동 28~48번지 일대. 종로플레이스, 인의빌딩 일대이다.] }}} || ||<-2> '''면적''' || 약 31,551㎡ || ||<-2> '''설립시기''' || 1587년 || ||<-2> '''해체시기''' || 1785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10-11 14-25-35.jpg|width=100%]]}}} || || {{{#gold '''이현궁 터 현재 자리'''}}}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시대]]의 별궁이자 [[광해군]]의 [[잠저]]였던 곳이다. 면적이 대략 31,551㎡(9,544평)정도로 상당한 규모였다고 한다. == 역사 == [[광해군]]은 13세 되던 해인 1587년([[선조(조선)|선조]] 10년) [[문성군부인|류자신의 딸]]과 혼인하여 따로 독립하여 나와 살았다. 정착한 동네는 배밭이 많은 걸로 유명해서 동네 이름이 '배오개'였는데 이를 한자로 '배나무 이(梨)'에 '고개 현(峴)'을 써서 '이현(梨峴)'으로도 불렀다. 이곳에서 살던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이후 [[선조(조선)|선조]]와 함께 [[궁]]에서 살면서 이곳은 빈 집이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이현의 옛집은 왕의 잠저로 ‘이현궁’으로 불렸다. 이후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의 [[사당]]을 두기도 했고 [[왕세자]] [[이지]]의 결혼식 때 세자빈이 친영하는 별궁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다 1623년(인조 1년) 광해군의 조카 능양군은 반정을 일으켜 [[인조]]로 즉위했다. 인조는 친아버지 정원군을 [[정원대원군]]으로, 친어머니 구씨를 [[인헌왕후|연주부부인]]에 올린 뒤 어머니에게 광해군의 잠저였던 이현궁을 드렸고 ‘계운궁(啓運宮)’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훼손되어 [[인조]]는 한동안 [[광해군]]이 지은 경덕궁을 사용했다. 인조는 계운궁에서 지내던 어머니를 경덕궁으로 모셨고 연주부부인 구씨는 [[경희궁 회상전|경덕궁의 회상전]]에서 사망했다. 이후 [[병자호란]]으로 동생 [[능원대군]]이 집을 잃자 이현궁을 하사하여 살게 했다. 세월이 지나 [[숙종(조선)|숙종]] 때는 능원대군의 옛집을 사서 [[숙빈 최씨|숙의 최씨]]의 제택으로 삼게 했다. 그 뒤 [[연잉군]]이 가례 후 이현궁에서 살기로 했으나 무산되고 숙종이 마련해준 [[창의궁]]에서 살게 된다. 1711년(숙종 37년)에는 이현궁을 환수하여 [[왕실]]에서 직접 관리했다. 1718년(숙종 44년)에는 [[민회빈 강씨]]를 복권하면서 강빈의 옛 신주를 이현궁에 옮겨 잠시 봉안하기도 했다. [[영조]] 때는 당시 내수사에 소속되어 있던 이현궁을 서 3녀 [[화평옹주]]에게 주려고 [[경복궁]] 옛 터의 [[소나무]]를 베어 수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g010803_01.gif|width=100%]]}}} || || {{{#gold '''장용영의 본영을 그린 그림 〈본영도형〉'''}}} || [[정조(조선)|정조]] 즉위 후 설치된 장용위가 이곳 이현궁에 들어섰고 이후 [[장용영]]으로 승격된 뒤 규모를 늘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순조]] 즉위 후 장용영은 폐지되었고 이현궁 터는 [[훈련도감]]의 동쪽 군영으로 사용되었다. [[구한말]]에는 동쪽 군영 자리에 일본군 보병 59연대 1대대가 주둔했다. 1908년([[융희]] 2년) 부대가 [[용산구]] [[병영]]으로 이전한 뒤에는 1909년(융희 3년) 동아연초주식회사 사택으로 대여했다가 그해에 다시 북측의 기존 가옥을 철거하고 경성재판소 관사의 신축이 결정되었다. 이후 한국담배인삼공사 서울영업본부로 사용되다가 1993년 [[대치동]]으로 이전하면서 [[국민은행]], 태승플래닝으로 넘어가 현재는 효성쥬얼리시티가 들어서 있다. 이 밖에 다른 이현궁 부지들 대부분은 현재까지 [[국가]] 소유이다. 서울특별시선거연수원과 경찰공제회, 그리고 혜화경찰서 등 [[관공서]]가 들어섰으며 일부는 개인에게 넘어갔다. 개인 소유로는 종로플레이스, 인의빌딩 등이 있다. == 여담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G1927.jpg|width=100%]]}}} || || {{{#gold '''이현궁 터에 있는 나무'''}}} || 이현궁 터 근처에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중종(조선)|중종]] 시기인 1516년부터 500년이 넘는 지금까지 쭉 같은 자리에 있어 이현궁 역사의 산 증목으로 불린다. 서울특별시보호수 1-3으로 지정되었다. * [[광해군]] 시기,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 친척의 [[노비]] 복동이라는 사람이 [[저주]]를 한 죄로 국문을 당했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고, 복동은 이 때 도리어 궁에 들어가 저주한 물건을 파내고 [[기도(종교)|기도]]를 해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 복동이는 이현궁에 기도하는 곳을 설치하고 [[귀신]]을 그려놓았으며 밤낮으로 가무를 벌여 귀신을 즐겁게 했다. 사람들은 복동을 성인방(聖人房)으로 부르면서 조금만 의심나는 일이 생겨도 이곳에서 점보고 수많은 재물을 바치니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고.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