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목차] == 개요 == 李憲 (1042년 ~ 1092년) [[북송]] 시대의 환관. 자는 자범(子範). 북송의 오로벌하 당시의 사령관 중 하나로, 난주를 수복하게 된다. == 생애 == === 초기 === 개봉부(開封府) 상부현(祥符縣) 출신으로, 황우(皇祐) 연간[* 1049년부터 1054년까지]에 내황문이 되었고 공봉관으로 승진하였다. [[신종(송)|신종]]이 즉위한 뒤 영흥군로, 태원부로 주마승수(走馬承受)가 되었다. === 이헌의 솜씨 === 당시 [[거란족]]의 [[요나라]]와 [[탕구트족]]의 [[서하]]가 북송과 끊임없이 분쟁과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이헌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변사를 논의했고 이는 매우 신종의 뜻에 부합하여 총애를 받았다. 1070년 신종 파 대신 중 하나인 한강이 섬서를 경략하여 연안에 막부를 열었고 한강의 막하에서 주마감을 맡았다. 한강의 애장 [[충악]][* [[충세형]]의 아들로, 아버지의 연줄로 인해 청간성을 수비했다. 1067년 조정의 승인도 없이 외명산 부락을 투항시키고 수주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등 [[서하]]와 문제를 일으켰다.]은 서하가 점령한 횡산채를 노렸다. 이헌은 극언했지만, 충악은 아랑곳하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서하군을 격파하고, 군사를 이끌고 3만 명을 이끌고 나올성을 쌓고, 도감 조박과 [[연달]]을 보내 무녕고성 을 쌓게 했는데, 이 시점에서 군대를 나누는 것은 교착 상태에 빠지며, 상황이 변하면 모든 길을 스스로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하가 순녕호를 공격한 후 부녕을 포위했다. 당시 충악은 수덕군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하여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글을 쓸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서하가 이겼고 송군이 새로 쌓은 제방은 모두 서하의 소속이 된다. 조정에서 전보를 접한 후, 충악은 여주단련부사로 좌천되었고, 한강은 이로 인해 등주로 유배된 반면 이헌은 이번에 군무에 참여했기 때문에, 신종의 신임을 얻었고, 다시 하동로에 파견되어 경략사 조설의 막하에서 주마를 맡는다. 당시 조설은 이헌의 군사적 재능을 중시하였고, 두 사람의 변사에 대한 논견도 서로 맞아 북송 왕조의 북방방어에 대한 군사방어력을 어느 정도 강화한다. 곧 변진을 떠나 경사로 돌아와 송 신종에 의해 후원으로 승진한다. === 하주에서의 싸움 === [[왕소(북송)|왕소]]가 하황(河湟)[* 칭하이성 일대]의 수복을 청하면서[* 1068년 평융책 3편을 올렸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서하를 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 황 두개의 주를 반드시 차지해야 하고, 그래야 서하가 양면에서 협공을 당한다는 내용이다.] 이헌은 왕소와 함께 하주(河州)로 진군하였고 며칠 지나지 않아 북송군은 하주(지금의 간쑤성 린샤)를 점령하고 1,000리 이상의 땅을 개척하고 30만 명 이상의 인구를 모집했으며 심지어 강족 추장 목정의 아내도 포로로 잡는다.[* 이를 하주 전투라고 함] 북송은 이곳에 희하로를 설치하고 왕소를 경략위무사로 임명하였으며, 이헌도 전공으로 동염원사, 어약원 간당관에 봉해진다. 곧 서하의 공격이 있었으나, 우정곡과 가락성의 두 전투에서 송군은 다시 싸워 이긴다. 송 신종은 이헌의 군사 지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로 하여금 희하로를 안무하게 하고 왕소도 포상을 받는다. 바로 그해 2월, 표면적으로 잠잠해졌던 하황 지역의 전쟁이 재발하는데, 하주에서 쫓겨난 서하 추장 목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하주 지주 경사립은 소식을 듣고 급히 군사를 모아 답백성으로 갔지만, 급히 출병한 데다 적과 적과의 차이가 커서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경사립 부대는 겹겹이 포위된다. 하인들은 복수심에 불타서 벌떼처럼 몰려들었고, 송군의 사상자가 매우 컸고, 하주 지주 경사립도 난군에서 전사한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재상 [[왕안석]] 등은 하황 지역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왕소는 이에 반대했다. 이때 이헌은 노연로로 달려가 군사 상황을 보고 흥평까지 갔다가 하주 소식을 들은 즉시 멈추고 조정의 명을 기다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헌이 희하로로 달려가 왕소와 합류하여 하주의 변화에 대처하라는 송 신종의 명령을 기다린다. 여기서 왕소와 의견 대립이 있었다. 왕소는 먼저 목정의 포위망을 무너뜨린 다음 반대로 외부 지원군을 공격하여 하주의 포위를 싸우지 않고 해결할 수 있도록 한 반면 이헌은 상으로 장병들을 격려하고 목정을 죽일 것을 주장한다. 결국 왕소는 병사를 이끌고 하주를 우회하여 정강성을 직접 습격하여 불의에 하강을 공격하고 서하 통로를 차단한 후 남산의 요충지로 진입하도록 명한 반면 이헌은 소부대를 이끌고 하주성 밖에서 병력을 이끌고 싸운다. 일찍이 이헌이 서북을 순시하기 전에 신종은 그에게 황기를 하사했는데, 그 깃발에는 '''명으로써 도적을 파한 자는 배상한다'''는 7개의 큰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는 서북 장병들이 왕소에게 마음이 기울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투지가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출정 전 황기를 들고 군영 입구에 서서 삼군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령한다. >이 깃발은 천자가 내린 것입니다. 모든 장병들이 깃발을 바라보며 싸우니 마치 천자가 직접 독전하는 것 같으니 목숨을 걸지 않겠습니까! 장병들의 사기가 높아졌고, 이헌은 또 병사들에게 방산에 지은 모든 막사를 불태우라고 독촉하여 사투를 다짐한 후, 하주 전선으로 가서 목정이 이끄는 부대와 하주성 아래에서 처절한 백병전을 벌였으나 양측 모두 피해가 심했다. 이헌이 또 한 가지 계책을 세워 목정 등의 장막을 불태웠을 때, 강족들은 그제서야 인심이 산만해져, 모두 답백성으로 도망쳤고 그 여세를 몰아 적군을 대파하고 일거에 답백을 공격하여 여천으로 들어가 10여 개의 성벽과 보채를 연파하고, 목정은 대세가 기울자 북송에 투항한다. 하주 전투의 공으로 소선사, 가주방어사가 더해진 데 이어 경사로 돌아온 후, 내시성 압반으로 승진하고 황성의 사직을 담당하게 된다. === 서북 지역 경영 === 서북방 문제로 조신들의 불만이 많자 서북 지역에서 공을 세워야겠다고 마음먹고 이후 토번과 강족의 군대가 조주 등을 공격하나, [[충악]]과 함께 이를 격파한다. 얼마 뒤 또 다른 토번군도 송나라의 신위에 밀려 귀순했다는 소식이 경사에 전해지자 송 신종은 이헌을 선주관찰사, 선정사, 입내부도지로 봉하였다가 다시 선정사로 임명한다. 신종은 또 이헌에게 희하와 진봉의 재정을 모두 관리하라고 명했다. 이헌은 불필요한 지출의 10분의 6을 과감히 줄이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로 인해 서북 재정이 즉시 완화된 동시[* 당시 북송 정권은 서하와의 문제에 재정을 상당수 투입했다.]에 이헌은 신종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매년 서산(西山, 지금의 간쑤와 정경)의 거대한 목재를 끊임없이 경사로 운반하여 신종이 궁궐을 수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송 신종은 그에게 화려한 저택을 하사한다. === [[오로벌하]] 시기 === 1081년 [[서하]]에 내분이 생기자 충악[* 충악은 열흘 치의 군량만 있으면 된다는 등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과 [[유창조]], [[고준유]], [[왕중정]][* 이헌과 마찬가지로 환관이었다.]과 함께 서하를 공략할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란저우시|난주]]를 수복하였으나[* 이후 희하로는 희하난회로로 개칭되었다.], 각 장수들 간 단합이 되지 않아 대패하고 말았다.[* 특히 왕중정은 겨우 몇 리만 행군했는데도 서하의 국경으로 진입했다고 허위보고했다.][* 유창조는 고준유의 통제를 받았는데, 유창조는 용감하게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공성병기가 부족했다. 그러나 고준유는 무리하게 싸움을 독촉하였고 서하가 황하의 제방을 터트려 북송군 대부분을 몰살시켰다.] 그리고 총사령관이었던 이헌의 부대가 영주에 도달하지 못해 각 부대가 갈팡질팡하였다. [[오로벌하]] 때 참전한 장수들 대다수가 강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헌은 희하로의 대군을 보존한 공이 있다 하여 죄를 면하였다.[* 사후에 이헌은 이번 군사적 패배가 이만저만이 아님을 알고 급히 신종에게 상소하여, 한편으로는 자신이 난주·회주를 개발한 공로가 있음을 강조하고 또 한편으로는 중간에 막혀 흥, 영 이주로 예정대로 갈 수 없었다는 핑계로 최대한 다른 장수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공을 가로채려 했다.] 이 패전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헌은 대군을 재기하여, 병력을 경원 일대에 집중시키고, 서녕재에서 요새를 설치하여 오사성에 도착하여, 군대를 주둔시켜 방어하고, 서하를 토벌하여, 공적을 만회할 것을 주장한다. 재상 왕규가 이에 동의하나, 왕안례의 반대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헌은 이를 강행하는데, 백성들은 지난번 징용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굶주려 죽는 것을 보고 다시는 군량미를 운반하기를 꺼렸다. 부역을 피하기 위해 백성들은 산속에 들어가 스스로를 지키며 지시를 듣지 않았다.[* 관리가 산속으로 몰아넣고 툭하면 구타했고, 해주(지금의 산시 운성) 일대에서는 현령이 백성을 모집하지 못하는 현상도 있었다.] 또 다른 환관 이순거는 이헌의 소행에 불만을 품고 신종에게 상소하자 그제서야 이헌에게 군사를 그만두고 백은과 비단 4천을 주고, 경원로경략안무제치사로 임명하고, 위사 300명을 배정하였는데, 이헌은 다시 희하로로 돌아와 진봉로의 병마를 통제한다. === 영락성 전투와 난주 방어 === 서하가 북송 오로의 대군을 격파한 후 북송 국경 지역의 침탈은 더욱 자행되었고 이를 막기 위해 1082년 7월, 송 신종은 사중 [[서희(북송)|서희]]와 내시 이순거에게 변을 순시하도록 위임하여 충악과 상의하여 하(夏), 은(銀), 석(石)의 3개 주의 경계에 영락성을 건설케 하였는데, 또 이헌과 서희로 하여금 이를 돕게 한다.[* 충악이 수원 부족을 이유로 반대하나, 신종은 듣지 않고 오히려 서희에게 병사들을 이끌고 공사를 시작하여 14일 안에 성을 수리하라 명한다.] 서희는 영락성을 쌓은 후, 부총관 곡진을 남겨두고 10,0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킨다. 영락성의 축조는 서하에 큰 위협이 되었고 서하가 30만 군대를 이끌고 영락성을 공격한다. 서희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성으로 올라가 두리번거렸지만, 서하군이 들판을 가득 메운 것을 보니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서희는 군사도 모르고, 공을 탐내 만 명의 병사로 성 아래에 진을 쳤는데, 결국 패잔병이 성 안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영락성은 서하군에 둘러싸여 수원을 차단당했다.[* 성 안의 병사들은 말똥을 갈아서 즙을 내어 마셨고, 대부분의 사망자는 갈증이 난 상황이었다.] 서하는 또 두 부대를 파견하여 이헌과 [[심괄]]의 두 지원군을 가로막았고, 충악은 이에 원한을 품고 구원하지 않았다.[* 충악은 그 와중 병사한다.] 그 후, 서하군은 비를 타고 밤에 급히 공격했고, 영락성은 마침내 함락되었고, 송군은 서희를 포함한 수만 명의 사졸이 전사하고, 230명 이상의 관리들을 잃게 된다. 1083년 [[영락성 전투]] 이후 서하군이 난주를 공격하였고 서문관을 처음으로 파괴하였다. 병마검할 왕원욱은 결사대 700여 명을 모아 밤중에 매달아 성을 내려 단도를 들고 서하군의 진영을 급습하여 서문관을 탈환할 수 있었으나 이헌은 성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선경으로 좌천되었다. 이헌은 난주의 지리적 위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서하가 여러 차례 군사를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평안한 척하며 중병을 모아 대대적으로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그래서 성을 쌓고 벽을 지키라고 명령했고, 성 수비 기구를 쌓아두고 적극적으로 성을 지킬 준비를 했다. 이듬해 겨울, 서하가 난주로 대거 진격했고, 기병대는 80여만 명이라고 불렸다. 이헌의 충분한 준비로 서하 포위전은 10여 일 동안 함락되지 못하였고, 결국 군량과 마초가 부족하여 군대를 철수하였다. 신종의 조서가 이헌에게 알리골과 연락하여 협공하자, 그는 다시 정기를 뽑아 추격하여 과연 승리를 거두었다.그러나 이헌은 뒤늦게 큰 공을 세워 조정 대신들을 격분시켰다. === 강등의 연속 === [[철종(송)|철종]]이 즉위하자 영흥군로(永興軍路) 부도총관(副都總管)이 되었고 제거숭복궁이 되었다. 어사중승 유지(劉摯)가 이헌에 대해 탄핵하여[* 공명을 탐하여 서북 국경에서 여러 번 문제를 일으키고 국민을 해치고 국가에 해를 끼쳤다고 상소했다.], 이헌은 선주(宣州) 관찰사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우천우위장군(右千牛衛將軍)으로 강등되었고 진주(陳州)로 유배되었고 1092년 사망했다. === 사후 === 이헌은 소성 원년(1094년)에 무태군(武泰軍) 절도사로 추증되고 민각(敏恪)이라는 시호를 받았다가 이후 충민(忠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주요 영향 == 이헌은 환관이었지만 생애의 대부분을 서북 변방에서 보냈다. 송 신종 때 국경을 감시하고 지휘하는 징벌활동에 여러 차례 참여했고, 좋은 제안을 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 한때 재정을 겸하여 불필요한 비용을 10분의 6이나 절감하였다. 원풍 4년(1081년) 6월, 북송은 서하 황실의 내분을 틈타[* 이병상이 양태후에게 감금되고 말았다.] 희하, 연[* 충악이 담당했다.], 환경, 경원 등 오로대군 20만 명을 모아 서하를 공격하였다. 환관 이헌은 희하경략사(熙河經使使)를 지냈고, 희(熙)와 진(秦)의 두 주(州)의 군대는 같은 길로 희주(熙州, 지금의 임도)에서 북쪽으로 가서 서하(西夏)의 뒷면을 공격했다. 8월, 이헌은 대장 이호를 선봉으로 하여 지금의 린타오에서 출발하여 산을 넘어 강고성에 이르렀고, 다시 서시신성을 취하여 9월 2일 난주를 공격하였다. 이헌은 성 안에 사령부를 두고 난주를 세웠다. 이듬해 정월, 북송 조정은 희하로를 희하난회로로 바꿈으로써[* 참고로, 희하난회로는 송 휘종 시기인 1105년 희하난황로로 바뀐다.] 란저우는 북송의 판도에 편입되었다. == 평가 == >환관 이헌은 장수로서 비록 땅을 넓히고 적을 항복시켰고 백성을 해치지 않았지만 결국 중국은 우환에 빠지게 되었다.[* <송사>의 평가] [[증공]]은 이헌이 고토를 회복한 것과 강족과 싸우면 연전연승했다는 것을 극찬한 바가 있었다. [[소식(시인)|소식]]에게는 왕중정, 송용신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해한 죄를 피할 수 없다는 평을 받았다.[* 이를 보면 북송군의 서북 개척으로 인해, 많은 인력을 소모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채경(북송)|채경]]에게는 이헌이 비록 환관이나 뛰어난 전술로 인해 북송의 고토를 회복하는 공을 세울 수 있었다는 평을 받았다. [[왕부지]]에게는 왕소, 고준유, 서희와 함께 적으로 취급을 받았다. == 여담 == [[동관(북송)|동관]]이 이헌의 문하에 있었고, 그를 따라 서북 지역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042년 출생]][[분류:1092년 사망]][[분류:환관]][[분류:카이펑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