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검찰총장)] || {{{#ffffff '''역임한 직위'''}}}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 [include(틀:역대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94973, #194973, #194973, #194973, #194973, #194973)" '''[[검찰총장|{{{#FFFFFF 대한민국 제8대 검찰총장}}}]][br]{{{#FFFFFF {{{+1 이태희}}}[br]李太熙 | Lee Tae-hee}}}'''}}}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태희(법조인).jpg|width=100%]]}}} || || '''창씨명''' ||산코 다이키(三江太熙)[br]산코 타츠오(三江達夫) || || '''호''' ||소산(少山) || || '''본관''' ||[[청주 이씨]][* 진천파(鎭川派) 32세 희(熙) 항렬.] || ||<|2> '''출생''' ||[[1911년]] [[11월 8일]] || ||[[평안남도]] [[강동군]][br](現 [[평양시]] [[강동군]]) || || '''사망''' ||[[1999년]] [[10월 27일]] (향년 87세)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법조인]]이자 제8대 [[검찰총장]]. [[일제강점기]] 검사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 사법 부문에 등재되었다. == 생애 == 1911년 11월 8일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아버지 이병돈(李秉敦, 1886 ~ ?)[* [[보성전문학교]] 출신이다.]과 어머니 [[파평 윤씨]](1881 ~ ?) 사이에서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에 유학하여 1934년 사가고등학교, 1937년 [[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40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경성지방법원 검사대리를 거쳐 광복 때까지 해주지방법원에서 [[검사(법조인)|검사]]로 근무했다. [[8.15 광복]] 후 월남하여 1945년 11월 법무국 특별검찰청 검사에 임명되었고, 1948년에는 [[대검찰청]] 검사로 근무했다. 이후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 검찰국장을 거쳐 1949년 9월 23일부터 1950년 6월 21일까지 [[https://www.spo.go.kr/site/seoul/ex/general/General_List.do|제2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을 지냈다. 1950년 서울지검장 재직 중 제2대 검찰총장이던 [[김익진]]이 서울고검장으로 좌천되자 이승만 대통령을 상대로 인사처분무효소송을 냈다가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좌천됐다. 1951년 [[거창 양민 학살사건 ]]의 합동조사단장으로 보고서를 낸 후 사임,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이후 1951년부터 1958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사회과학대학|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겸 법정대학장을 지냈고, 1958년 한국형사법학회 회장, [[서경대학교|국제대학]] 학장 등을 역임했다. 1959년에는 [[서울지방변호사회]] 부회장을 지냈다. [[4.19 혁명]]으로 출범한 [[허정]] 과도내각에서 [[1960년]] [[5월 5일]]부터 [[1961년]] [[5월 27일]]까지 제8대 [[검찰총장]]을 지냈다. [[5.16 군사정변]]으로 검찰총장직에서 경질되자 1963년 [[변호사]]를 재개업해 활동하였다. 1964년부터 1968년까지 [[https://lawsociety.or.kr/%EC%97%AD%EB%8C%80%EC%9B%90%EC%9E%A5|제4대]] [[한국법학원]]장을 지냈다. 1969년부터 1990년까지 한국어문교육연구회 부회장, 1972년 변호사 징계위원, 1990년 한국어문교육연구회 고문 등을 지냈고, 1999년 10월에는 장안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에 위촉되었다. == 미디어에서 == [[제2공화국(드라마)|제2공화국]]에서는 [[신충식]]이 연기하였다. == 가족관계 == 3남1녀를 두었다. * 장남 이대황: 토털해운 대표 * 차남 이대우: [[고합그룹|고합]] 부사장 * 삼남 이대철: 농장 경영 * 장녀 이희영 == 기타 == [[파일:이태희아들.png]] 이태희의 아들이 [[그것이 알고 싶다]]와 인터뷰한 내용이 논란을 불러 일으킨 바 있다.[[https://blog.naver.com/nonepapa/221105273563|링크]] >(피디: 이태희 검사가 혹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와 있는 걸 아십니까?) >거기 들어가 있다,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어요. 실제로 이야기 듣는 건 처음이에요. >(피디: 한 번 보여 드릴까요?) >필요 없어요. 그런 거지 같은 책은 안 보기로 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사람들도 반쯤 정신 나간 놈들이죠 >그걸 갖다가 거의 100년 전 이야길 들춰서 뭘 하겠다고 무슨 도움이 된다고. >과거는 다 잊어버려야 된다고요. 거기서 뭘 배울게 있다면 모르지만. >지나간 일에서 뭘 배우겠어요, 과거에서. >세상이라는 건 그런 거예요. 언제든지 공평하지 않은 게 인생이라고요. >가령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은 왜 가난하게 살고 친일했던 사람은 잘 살고 그러냐 >그것도 한 세대만 따지는 거죠. >그게 두 세대 세 세대 그렇게 넘어간 후에는 잊어버리고 미래를 생각하는 게 더 나아요. >그런데 지금 문재인 씨는 미래 이야기 하는 건 난 들어본 적이 없어요. 미래 이야기는. >과거만 뒤지고 있어요. >지금은 이제 뭐 박근혜 그렇게 하고 나서 못마땅한지 그 다음에 >이명박 것도 뒤지고 있다고요. 과거 뒤지는 게 전 제일 미워요. >(기자: 어르신 그런데 과거도 좋은 미래로 가려면 과거를 정리하는 것도 중요한 거 아닌가요?)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으니까 둘 중 하나를 택해야죠.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태희, version=22)] [[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대한민국의 사회과학 교수]][[분류:강동군 출신 인물]][[분류:청주 이씨]][[분류:1911년 출생]][[분류:1999년 사망]][[분류:검찰총장]][[분류:실향민]][[분류:고등문관시험 출신]][[분류:도호쿠대학 출신]][[분류:장면 내각/인사]][[분류:이화여자대학교 재직]][[분류:이승만 정부/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