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운대 28장)] [include(틀:후한서)] 李忠 (? ~ 43) [목차] == 개요 == 양한교체기의 인물로, 자는 중도(仲都). 청주 동래군(東萊郡) 황현(黃縣) 사람이다. [[운대 28장]] 중 한명으로 서열 25위에 속한다. == 생애 == 이충의 아버지는 고밀현(高密縣)의 도위를 지냈으며, 이충도 아버지처럼 전한의 [[평제]] 원시(元始) 연간에 관리에 임용되어 낭(郞)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낭 관서에는 수십 명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충은 그들 중에서도 예의를 숭상하고 품행이 단정하기로 유명하였다. [[왕망]]이 [[신나라]]를 건국하자 신박(新博)의 속장(屬長)이 되었고[* 왕망은 신나라를 건국하고 한나라 시절 이용한 관직의 명칭과 지명을 대대적으로 바꿨다. 이때 신도군(信都郡)은 신박이 되었고 관직명인 도위는 속장으로 바뀌었다. 물론 신나라가 멸망한 이후 이러한 명칭은 전부 한나라 시절로 되돌아가고 폐기되었다.], 군(郡)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경시 원년(23년),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하고 녹림군의 추대를 받은 [[경시제]] 유현(劉玄)이 정권을 잡았다. 유현은 각 군국(郡國)에 사자를 파견하였는데, 이충은 이때 도위관(都尉官)에 임명되었고 신박 또한 원래 명칭인 신도군(信都郡)으로 되돌려졌다. 다른 하북의 각 주군들도 경시제의 사자로부터 관직을 수여받긴 하였으나 단지 사태를 관망할 뿐 제대로 복속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경시제는 대사마 [[광무제|유수]]를 하북으로 보내 여러 군현들을 위로하게끔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왕랑이 한단(邯鄲)에서 한나라 황족을 사칭하며 거병하였고, 유수는 순식간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충은 신도태수 [[임광]] 휘하에서 성을 굳게 수비하면서 유수를 기다렸다. 경시 2년(24년), 계(薊)에서 빠져나와 신도로 도망쳐온 유수는 임광의 건의에 따라 병사를 모으고 왕랑과의 전투를 준비하였다. 유수는 자신이 차고 있던 허리띠를 풀어 이충에게 하사하면서 그를 우대장군으로 삼고 무고후(武固侯)에 봉했다. 이후 종광(宗廣)에게 신도를 맡기고 이충, 임광 등을 대동하여 항복하지 않는 현들을 점령해 나갔다. 유수가 고형현(苦陘縣)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노획한 재물을 점검하였는데 이충만은 약탈한 재물이 없었다. 유수가 장수들에게 말했다. > "내 특별히 이충에게 상을 내리고 싶은데, 경들 중 불만있는 자 있는가?" 이윽고 유수는 자신의 여마(驪馬)와 수놓은 비단 등을 하사해 이충을 치하하였다. 유수군은 계속 진격하여 거록(鉅鹿)을 포위하였지만 쉽게 함락되지 않아 예상보다 지체되었다. 왕랑이 이 틈에 자신의 장수를 파견해 신도를 공격하니, 신도의 호족 마총(馬寵)이 몰래 성문을 열고 왕랑군을 맞아들였다. 이충의 가족들을 붙잡은 왕랑의 장수는 그들에게 이충을 불러들이라 명령했다. 당시 마총의 동생이 이충 휘하에 교위(校尉)로 복무하고 있었기에 이충은 그를 불러 책망하다가 맨손으로 때려 죽여 버렸다. 주위에 있던 장수들이 깜짝 놀라 말했다. > "가족들이 아직 남의 손에 잡혀 있는데, 그 동생을 때려 죽이다니 정말 너무 하십니다." 이충이 답했다. > "만약 적을 내버려두고 주살하지 않는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은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유수가 신도를 구원할 부대를 따로 편성하려 하자 이충은 사양하며 말했다. > "명공(明公)의 큰 은혜를 입어 목숨 바쳐 명령을 받들 것만 생각할 뿐, 감히 종친(宗親)을 돌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유수는 임광을 보내 신도성을 구원하려 했으나, 도중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탈영하는 바람에 임광은 유수의 진영으로 도망쳐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때마침 경시제가 보낸 장수가 신도를 탈환하면서 이충의 가족들은 구원받을 수 있었다. 유수는 이충을 신도로 보내 태수의 업무를 보게 했고, 군(郡)으로 복귀한 이충은 왕랑에게 항복했던 자들 수백 명을 잡아 처형하였다. 유수가 한단을 함락해 왕랑을 주살한 뒤 임광을 신도로 돌려보냈고, 이충은 그와 교대해 다시 도위로 유수군에 들어갔다. 건무 2년(26년),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將)에 임명되고 중수후(中水侯)에 봉해져 식읍이 3천 호에 이르렀다. 건무 4년(28년), 호아대장군 갑연, 평적장군 방맹(龐萌)과 함께 동해(東海)의 군벌 동헌(董憲)을 정벌하였다. 건무 5년(29년), 방맹이 난을 일으키자, 이충은 광무제를 수행하여 이를 진압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 건무 6년(30년), 단양태수로 옮겨졌다. 그가 막 부임할 때만 해도 강(江)과 회(淮) 땅에는 사병을 부리면서 중앙에 복종하려 하지 않는 호족들이 무척 많았다. 이충은 그들을 회유하면서 투항할 것을 종용하고, 말을 듣지 않을 시 곧바로 베어버리니 10개월만에 단양군이 전부 평정되었다. 또, 단양군 내에는 [[산월족]]들이 매우 많이 살아 혼례의 풍습이 중원에 비해 낙후하였다. 이충은 이들을 교화시키고자 학교를 세워 예절 교육에 힘쓰고 법도를 가르쳤다. 그리고 매년 봄과 가을에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도록 하고, 명경(明經)으로 관리를 등용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예의를 숭상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이충은 넓은 황무지를 개간해 유민들을 정착시켰다. 이리하여 그가 단양태수로 있는 3년 동안 단양에 정착한 유민이 5만 호에 달했다. 건무 14년(38년), [[삼공]]이 지방관들의 실적을 평가하면서 이충의 공이 천하제일이라 아뢰었다. 이에 광무제는 이충을 예장태수로 옮겼다. 그러나 얼마 안가 병에 걸려 관직에서 물러났고 광무제는 그를 수도로 불러 휴양하도록 하였다. 건무 19년(43년), 사망하고 그의 아들 이위(李威)가 뒤를 이었다. 이위 사후 손자 이순(李純)이 작위를 이었는데, 이순의 어머니가 숙부를 살해한 사건에 연좌되어 작위가 몰수되고 봉국도 폐지되었다. [[분류:후한의 인물]][[분류:한나라의 공신]][[분류:4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