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춘숙}}}'''[br]'''李春塾'''}}}}}}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춘숙.jpg|width=100%]]}}} || || '''이명''' ||이건(李健) || || '''호''' ||관오(觀吾) || || '''본관''' ||[[전주 이씨]][* 안풍대군파로 추정.] || ||<|2> '''출생''' ||[[1889년]] [[6월 16일]] || ||[[함경도]] [[정평군|정평도호부]] 남선덕사 창리[* 인근의 신흥리, 경흥리, 서중리, 중리, 인상리, 명호리, 신남리와 함께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br](현 [[함경남도]] [[정평군]] 창신리) || || '''사망''' ||[[1935년]] [[3월 1일]]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군무차장과 학무차장을 역임했다. == 생애 == 이춘숙은 1889년 6월 16일 함경도 정평도호부 남선덕사 창리(현 함경남도 정평군 창신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1916년 2월 [[보성전문학교]]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법과]]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8년 6월 [[주오대학]]을 졸업했다. 주오대학 졸업 후 1918년 7월 홍도(洪濤)와 함께 [[만주]]·[[시베리아]] 지방 시찰 도중 [[우수리스크|니콜리스크]]에서 [[문창범]], [[윤해(1888)|윤해]]와 회견한 후, 1919년 4월 8일 [[이규갑]]·홍도·한남수(韓南洙)·이봉수(李鳳洙)와 함께 [[중화민국]] [[상하이]]로 [[http://db.history.go.kr/id/su_004_1919_04_08_0670|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지원과 항일무장투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구국모험단의 참모로 활동하였다.[* 구국모험단은 국내 각지에 있는 조선총독부 관서 파괴 및 주요인물 암살과 군자금 조달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국내 각지에서 지방유지, 재산가, 학교, 종교단체 등의 현황을 조사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등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에 종사한 단체이다.] ||[[파일:임시정부 국무원 - 신익희, 안창호, 현순 (앞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뒷줄)1.jpg]]|| ||(사진 설명: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1886)|김철]], [[윤현진(독립운동가)|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1919년 9월까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및 부의장, 군무차장(軍務次長)을 역임했고, 1920년 4월까지 임시정부 학무차장(學務次長)을 역임했다. 임시정부 학무차장으로 재직하면서 임시정부 헌법개정, 국채통칙(國債通則), 공채발행조례(公債發行條例) 등의 제정에 참여했다. 한편 1919년 11월 독립대에 참여하였으며, 1920년 11월에는 상해민단(上海民團) 단장 [[여운형]]이 발기한 신한문화동맹(新韓文化同盟)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 11월경 상하이에서 체포된 후 조선으로 압송되었고, 1921년 6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 본형에 산입)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29&evntId=0034974718&evntdowngbn=Y&indpnId=0000006902&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공소하였으나 그해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80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0564&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공소를 취하하여]] 곧 청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80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0564&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1921년 당시 형사사건부]]에는 이춘숙의 주소지가 '[[경상북도]] [[김천시|김천군]] [[지례면]] 녹경동'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우선 김천군 지례면에는 녹경동이라는 행정구역이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1919년 4월부터 1920년 11월까지 줄곧 상하이에서 생활한 그가 이곳에 주소지를 두고 생활했을리가 만무하다. 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29&evntId=0034974718&evntdowngbn=Y&indpnId=0000006902&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1921년 1심 판결문]]에서 주소지가 부정(不定)으로 기재된 것을 보면 추측건대 서류상으로 다른 이의 주소지와 혼동이 되었거나 이춘숙이 주소지를 허위로 기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1927년 12월 6일 [[http://db.history.go.kr/id/npda_1927_12_07_v0002_0310|출옥한 후]]에는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소되기 이전까지 [[신간회]] 경성지회의 총무간사, 중앙집행위원, 중앙상무위원, 조사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1935년 3월 1일, 4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이춘숙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각주]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정평군 출신 인물]][[분류:전주 이씨]][[분류:1889년 출생]][[분류:1935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고려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주오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