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 rd1=이진호)] || '''{{{#eccd7a 역임한 지위}}}'''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총독부 중추원)] ---- [include(틀:조선군 훈련대 간부)] ---- [include(틀:역대 일제강점기 및 미군정 경상북도지사)] ---- [include(틀:역대 전라북도지사)] }}} || ---- ||<-2>
'''[[조선총독부 중추원|{{{#eccd7a 제6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br]{{{+1 이진호}}}[br] 李軫鎬|Yi Chinho'''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Lee Jin-ho (1867-1946).jpg|width=100%]][br]{{{-1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재임 시절.}}}}}} || ||<|2> '''이름''' ||이진호 (李軫鎬) || ||리노이에 신코 (李家軫鎬) || ||<|2> '''출생''' ||[[1867년]] ([[고종(대한제국)|고종]] 4) [[8월 7일]] || ||[[한성부]][br](현 [[서울특별시]]) || || '''사망''' ||[[1946년]] [[9월 3일]] (79세) || ||<|8> '''재임 기간''' ||초대 [[경상북도지사|경상북도장관]] || ||[[1910년]] [[10월 1일]] ~ [[1916년]] [[3월 28일]] || ||제3대 [[전라북도지사|전라북도장관]] || ||[[1916년]] [[3월 28일]] ~ [[1919년]] [[3월 2일]] || ||초대 [[전라북도지사]] || ||1919년 3월 30일 ~ 1921년 8월 5일 || ||제6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 ||[[1941년]] [[5월 12일]] ~ [[1943년]] [[10월 19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의 이씨]] (全義) || || '''호''' ||성재 (星齋) || || '''학력''' ||--[[제중원]]-- {{{-2 (중퇴)}}}[br]연무공원 {{{-2 (졸업)}}} || || '''직업''' ||[[군인]], [[관료]], [[정치인]] || || '''주요 경력''' ||조선군 훈련대 간부[br]경상북도 도장관[br]전라북도 도장관[br]전라북도 도지사[br]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 || '''비고'''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반민족행위자 705인]][br][[친일인명사전]] 등재 ||}}}}}}}}} || [목차] [clearfix] == 개요 == >"천은의 망극은 물론이어니와 이것은 다만 자기 1인의 광영이 아니라 일반 조선인의 광영이라" >----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취임할 때 이진호. >'''"일찍부터 동양의 사정을 우려하여 일본에 의뢰해야 함을 꿰뚫어 보아 조선의 영원한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분기한 사람."''' >「조선공로자명감」(1935) 구한 말 [[개화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1867년]]생. 본관은 전의이고, 호는 성재이다. 조선 후기의 [[무신]]이자 [[관료]]로 군사교관 다이의 신임을 받아 친미파 관료로 활동했다. 친일 내각이 수립된 직후에는 훈련대장으로써 임최수, [[이도철]], [[이범진]] 등의 정동파 관료들과 [[춘생문 사건]]을 일으키다 변절해 [[어윤중]]에게 밀고했고, 이후부터는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로 전향했다. [[아관파천]] 직후, [[민족 반역자|반역자]]로 낙인 찍혀 [[일본]]으로 망명했고, 몇년간 위장하며 [[일본]]에서 지내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귀국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상북도장관, 전라북도지사 등을 재임했고, [[1940년대]]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일본 귀족회 의원을 역임했다. == 일생 == [[1867년]](고종 4) [[8월 7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의 이씨]]이고 [[아호]]는 성재. === 관직 생활 === 어려서 [[한문]]을 배웠고, 통역관 양성소에서 [[영어]]를 배운 적이 있다고 한다. [[1882년]] [[무과]]에 급제했다. [[1888년]] 군사 학교인 [[연무공원]]을 졸업하고, [[무관]]으로 근무했다. [[영어]]에 능숙해 연무공원 [[미국인]] 교관 다이(Dye)의 신임을 얻었고, [[친미파]] 관료로 평가받았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제2차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교도중대[* 이 부대는 일본군의 특수 훈련을 받은 부대였다.]를 이끌고 난 진압에 참전한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다시 [[친일파]] 정권이 성립하자 [[1895년]] 다이와 임최수, [[이도철]], [[청안군(1851)|청안군 이재순]] 등이 친일 내각을 전복시키려던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고, 이진호도 이 계획에 참여하고 있었으나 변심해 이 계획을 [[탁지부]]대신 [[어윤중]]에게 밀고하며 춘생문 사건을 실패로 끝냈고, 이때부터 [[친일파]]로 전향하게 된다. 석달 후, [[이범진]]과 [[이완용]], [[이윤용(1855)|이윤용]]에 의해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유길준]], [[우범선]], [[이두황]], 이범래, 구연수 등의 [[친일파]]들과 일본 대사관을 거쳐 [[일본]]으로 피신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왕명으로 이진호를 비롯해 유길준, [[조희연(1856)|조희연]], [[장박]], 권영진, 이두황, [[우범선]], [[이범래]] 등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2월 15일]] 유길준, 이진호 등에 대한 참수명령을 내려졌다. 망명 이후에는 [[일본]]으로 망명했던 [[우범선]]이 암살당했고 이후에도 일본으로 망명한 이진호와 유길준, [[박영효]] 등을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그래서 그는 변장하며 일본 도쿄 내에서도 [[조선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은신해 생활했다. 이후에도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망명한 친일파 인사들을 [[조선]]으로 송환해달라고 일본 정부에 요청했다. [[1904년]] [[3월]], [[이토 히로부미]]가 [[내한]]하자 망명자 중 요인[* 차례로 이진호, [[영선군|영선군 이준용]], [[박영효]], [[이규완(1862)|이규완]], [[유길준]], [[조희연(1856)|조희연]], [[장박]](장석주), [[이범래]], 조희문, 구연수, [[이두황]], [[신응희]], [[권동진]], [[정난교]] 등 14인.]을 해외로 추방하거나 변방에 유치시킬 것을 제의하여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일본]]은 약속한 망명자 처분을 지키지 않았다. [[1904년]] [[4월]] 중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일본 공사관에 이진호 등을 비롯한 14인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다시 요청했다. 그러나 또다시 거절되었다. 그는 10년 동안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보내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직후 귀국해 [[대한제국 중추원]] 부찬의 등에 임명되었다.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 일제강점기 === [[일제강점기]]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일본 제국|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참여했다. [[1910년대]]에 [[경상북도]] 장관, [[1916년]] [[전라북도]] 장관에 임명되었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전라북도지사]]를 역임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박중양]] 등이 이를 반대하며 만세 운동에 반대하던 지식인들과 관료, 지방의 지주들과 함께 자제단을 구성하자, 그도 [[전라북도]]에 전북자성회를 조직하고, 전남자성회 조직에도 참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거나 집에 돌아갈 것을 권고하며 만세 시위와 독립 운동 확산을 막았다.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촉탁, 조선중앙위생회 위원 등을 거쳐 [[1924년]]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임명되었다. 원래 총독부 부서의 국장은 [[일본인]]이 맡는 것이 관례였고, 학무부국장을 재임한 사례도 이진호와 엄창섭 이렇게 두 차례 밖에 없다. 1925년부터 1929년까지는 [[조선사편수회]] 고문을 지냈다.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1941년]]에는 부의장을 재임했고, [[1943년]]에는 [[귀족원(일본)|귀족원]] 의원까지 올랐다. 말년에도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각종 친일 단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 사망 === [[8.15 광복]] 이후인 [[1946년]], 79세로 사망했다. 그는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2008년]]에 이진호 소유의 토지에 대해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다. == 여담 == * [[호러스 뉴턴 알렌]]이 세운 의학교 [[제중원]]에 들어갔지만, [[중퇴]]했다. * [[민원식(1886)|민원식]]처럼 자치론을 주장하던 인물로 민원식이 [[양근환]]에 인해 암살되자 추도회를 열었고, 그 후 조선에도 [[징병제]]를 실시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 언사 == >"천은의 망극은 물론이어니와 이것은 다만 자기 1인의 광영이 아니라 일반 조선인의 광영이라" >----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취임할 때 이진호. >"신교육 제도가 점차 정비되고, 또한 학교가 보급되며 (...), 시대 밑 민도에 적합하게 조직적으로 교육의 진보와 보급을 이룬 것은 [[1910년]] 일한병합 후의 일이다" >"[[1906년]]에 우리 조선반도는 일한 양국 간의 조약에 의해 일본의 보호장치로 되고, 여기에 [[한국통감부|통감부]]가 설치되었으며,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공이 처음 통감의 직임에 취임하자마자 예의 조선 정치의 개혁을 꾀하여 민중의 행복을 위해 전력하였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온건개화파)] [include(틀:아관파천)] [각주] [[분류:조선의 무관]][[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일본군/조선인]][[분류:온건개화파]][[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1867년 출생]][[분류:1946년 사망]][[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전의 이씨]][[분류:일본 제국의 귀족원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