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진영}}}'''[br]'''李進榮'''}}}}}}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진영(영천 독립운동가).jpg|width=100%]]}}} || || '''호적명''' ||이무선(李武先) || || '''이명''' ||우자강(于自強)·조병식(曺秉植) || || '''자 / 호''' ||자강(自強) / 일우(一宇) || || '''본관''' ||[[경주 이씨]] || ||<|2> '''출생''' ||[[1907년]] [[4월 26일]] || ||[[경상북도]] [[영천시|신녕군]] 지곡면 오동동[br](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오동마을)[*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원대(독립운동가)|이원대]]는 이웃 마을인 운산마을 출신이며, 독립유공자 [[조병진]]과 [[조재복]]은 이웃 마을인 월지마을 출신이다.] || ||<|2> '''사망''' ||[[1951년]] [[4월 13일]] (향년 43세) || ||[[전라남도]] [[화순군]] || || '''임관''' ||[[육군사관학교]] {{{-2 (7기 특별반)}}}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8호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이진영(李進榮)은 1907년 4월 26일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오동동(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오동마을)에서 아버지 이집구(李集九)와 어머니 박유생(朴有生)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http://yeongcheon.grandculture.net/yeongcheon/toc/GC05101418|#]] 1921년 백학학원(白鶴學院)에 입학하였고 1922년 자천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8년 졸업하였다. 1933년 8월 이웃 운산마을의 [[이원대(독립운동가)|이원대]]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송병철(宋炳喆)의 권유로 [[난징]]으로 이동하여 그해 9월 [[의열단]]에 가입한 후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하였다. 1934년 3월 졸업하고 [[황포군관학교|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한인 특별 군관훈련반에 입학하여 정치훈련과 전술 및 내무·교양관계의 학과를 수료하고 1935년 4월 제3기로 졸업하였으며, 그해 7월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자 이에 가입하여 난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비밀 첩보 활동을 수행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12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싱쯔(星子)[* 현 [[중화인민공화국]] [[장시성]] [[주장시]] 싱쯔현(星子縣).]분교에 입학하여 1938년 5월 졸업하고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본부가 있는 [[우한시]]의 한커우(漢口)로 돌아와 선전공작원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상을 폭로하는 선무 공작 및 포로 심문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사용한 가명이 바로 우자강(于自強)과 조병식(曺秉植)이다. 1938년 10월 10일, 김원봉의 주도로 [[조선의용대]]가 창립되자 창군 요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이후 조선의용대 [[충칭]]판사처 주임 및 통신처 [[이창#s-1|이창]](宜昌) 주임에 임명되어 중국군사위원회와 조선의용대 본부 및 총대, 그리고 각 지대간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1942년 5월에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면서 광복군 총사령부 경리과에 소속되어 복무하였으며, 1943년부터 [[8.15 광복]] 때까지 광복군 부령(副領)으로서 총사령부 참모처 3과에 배속되었고, 그 밖에 제1지대 본부 구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해방 후 1946년 5월 한국광복군 대원들과 함께 귀국하였으며, [[경기도]] [[김포시|김포군]] 양동면 화곡리(현 [[서울특별시]] [[강서구(서울특별시)|강서구]] [[화곡동]])에 거주하였다. 1948년 8월 [[육군사관학교]] 7기 특별반에 입교하여 그해 10월 12일 임관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중대장(육군 소령)으로 참전하였으며, 1951년 4월 13일 [[전라남도]] [[화순군|화순지구]]에서 전사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87년 5월 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의열단/단원]][[분류:한국광복군/군인]][[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영천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이씨]][[분류:1907년 출생]][[분류:195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육군사관학교 출신]][[분류:6.25 전쟁/군인]][[분류:6.25 전쟁/사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