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조선 선조의 왕자, rd1=경평군(1600))] ---- ||<-7><:>'''[[전주 이씨|[[파일:전주 이씨 종문.svg|width=30]]]] [[은전군|{{{#FAFAD2 은전궁의 역대 종주}}}]]''' || ||<:> 1대[br][[은전군|은전군 이찬]] ||<:> {{{+1 ←}}} ||||<:>--'''{{{#FAFAD2 1.5대 [br]경평군 이호}}}'''--[* 본문 참조.] || {{{+1 →}}} ||<:> 2대[br] [[완평군|완평군 이승응]] || [include(틀:이달의 문화인물)] ---- ||<-2><#94153E> '''{{{+1 {{{#fff 이인응[br]李寅應}}}}}}'''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08-09 12-50-07.jpg|width=100%]]}}} || || '''본명''' ||이세보(李世輔) → 이호(李晧)[br] → 이세보(李世輔) → 이인응(李寅應) || || '''자''' ||좌보(左輔) || || '''출생''' ||[[1832년]] [[7월 11일]][br]{{{-1 (음력 [[임진|임진년]] 6월 14일)}}} || || '''사망''' ||[[1896년]] [[1월 7일]] (향년 63세)[br]{{{-1 (음력 [[을미|을미년]] 11월 23일)}}}[* 고종이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기해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쓴다는 [[태양력]] 반포를 했기 때문에 이세보의 [[사망]] 년을 1895년으로 적는 곳도 있다. 하지만 음력에는 원칙적으로 서력 기원을 쓰지 않는다.] || || '''본관''' ||[[전주 이씨]] [[능원대군]]파[* [[덕흥대원군]] 기준 11대손 '응(應)' 항렬. 파는 다르지만 [[효명세자]], [[철종(조선)|철종]], [[흥선대원군]]과 같은 항렬이다.] || || '''생부''' ||이단화 || || '''생모''' ||[[해평 윤씨|해평 윤씨(海平 尹氏)]] || || '''부인''' ||[[연안 김씨|연안 김씨(延安 金氏)]][br][[반남 박씨|반남 박씨(潘南 朴氏)]] || || '''자녀''' ||1남[* 후술하겠지만, [[양자(가족)|양자]]이다.] || || '''대표 작품''' ||《[[신도일록]]》, 《[[풍아]]》 등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종실]] 출신 [[문신]], [[시조(문학)|시조]] [[작가]]이다. == 이름 == 첫 [[이름]]은 '이세보(李世輔)'였다.[* 상단 표에 적혔듯이 그는 원래 [[능원대군]]의 후손으로, 능원대군파에서 1868년 [[흥선대원군]]이 '항렬자 통일령'을 내리기 전의 이세보 세대 [[항렬자]]는 '세(世)O' 였다.] [[풍계군]]의 [[양자(가족)|양자]]가 된 후 '이호(李晧)'로 바꿨고, 파양당한 뒤 다시 이세보로 돌아갔다가 1868년(고종 5년)에 마지막으로 '이인응(李寅應)'으로 재[[개명]]했다. 자세한 경위는 후술. 따라서 이 문서에서는 이름을 해당 시대에 맞게 '이세보', '경평군 이호', '이인응'을 혼용해 적는다. 대중들에게는 가장 오래 사용했던 이름 '이세보'로 잘 알려져있다. == 생애 == === 초기 === 1832년([[순조]] 32년) 6월 14일에 군수 이단화(郡守 李端和)와 [[해평 윤씨]] 윤응선(尹應善)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원래 [[정원군|조선 원종]]의 2남이자 [[인조]]의 동생인 [[능원대군|능원대군 이보]]의 8대손으로, 조선 왕실 직계와는 원종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기 때문에 200여 년이 지난 당시에는 왕족이 아니었다. 그의 본 가계는 다음과 같다. >[[능원대군|능원대군 이보]] - 영춘군 이정 - 창은군 이권 - 안풍군 이영 - 이후근 - 이복현 - 이제로 - 이단화 - '''이세보(이인응)''' 그러나 20살(만 19살)이던 1851년([[철종(조선)|철종]] 2년) 7월 14일 [[풍계군]]의 사후 [[양자(가족)|양자]]로 입적하여 왕족이 되었다. 이 때 작호 경평도정(慶平都正)을 받고 이름도 이호(李晧)로 고쳤다. 그 해 9월 경평군(慶平君)으로 승격했다. 풍계군은 [[은전군]]의 양자이기 때문에 [[호적]] 상으로 [[철종(조선)|철종]]의 [[8촌]] 형제가 되었는데[* [[철종(조선)|철종]]의 법적 가계: [[영조]] - [[효장세자|효장세자(진종)]] - [[정조(조선)|정조]] - [[순조]] - '''철종'''.[br]경평군의 법적 가계: [[영조]] - [[사도세자]] - [[은전군]] - [[풍계군]] - '''경평군'''.], 풍계군은 원래 [[은언군]]의 친자식이었기 때문에 철종은 '실제 큰아버지의 양자'[* 철종은 은언군의 아들이자 풍계군의 동생 전계대원군의 친아들이다.] 이호를 사실상 [[사촌]]처럼 대했다. 이후 오위도총부(中義大夫兼五衛都摠府) 부총관[* [[조선시대]] 중앙군 조직인 오위(五衛)를 총괄한 최고 군령(軍令) 기관이며 부총관은 최고 지휘관인 총관의 다음가는 서열이다.]이 되었다. 1853년(철종 4년)에는 철종의 [[수라상]]을 감독, 관리[* 이를 '감선(監膳)'이라고 한다.]하는 직책을 맡았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세력]]이 절정에 달한 상황에서 철종이 그나마 안심하고 맡길 만한 사람이 가까운 [[종친]]이었기에 그를 임명한 것이다. 1857년(철종 8년)에는 동지사은정사(冬至謝恩正使)[* [[조선시대]] [[중국]]에 정기적으로 보내던 [[사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동지]] 즈음에 보낸다.]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 때 철종은 그를 통해 청나라와 [[국제]] 정세에 대해 알아보도록 했지만 당시 기세를 떨치던 세도가들의 농간에 별 일 없다는 거짓 정보만 알리고 말았다. 참고로 이 때는 '''[[아편전쟁]] 등 [[서구권]] [[열강]]이 [[동아시아]] 침탈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 파양과 유배 === [[철종(조선)|철종]] 시절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왕족]]으로 [[경원군(1842)|경원군 이하전]], [[흥선대원군|흥선군 이하응]]과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곤 했다. 경평군은 세도가들과 사이가 안좋았고, 자연히 그들은 경평군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860년(철종 11년)에 일이 터졌다. 경평군의 생가 친동생 이세익(李世翊)[* 1868년 이택응(李宅應)으로 개명.]이 충량과에 발탁되어 특명으로 한림[* 翰林, [[조선시대]] 예문관 검열의 별칭.]에 임명받았으나, 세도가 [[안동 김씨]]들이 부당하다고 반대함으로써 임명이 힘들어졌다. 이에 철종이 전례없이 크게 노여워했는데, 이를 두고 세도가 쪽 [[신하]]들은 경평군이 친동생을 위해 철종에게 몰래 청탁해서 그런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일제히 [[한성부|도성]] 밖으로 나가 경평군에게 벌을 주라 청했다. 그러자 화가 난 경평군은 판중추부사 [[김좌근]], 영은부원군 김문근(金汶根)[* [[철인왕후]]의 아버지.] 등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세도]]를 대놓고 비난했는데, 이 때 한 말이 바로 그 유명한 '''"이 나라가 김씨의 나라인가! 이씨의 나라인가!"''' 였다.[* 단, 이 말 자체는 [[경원군 이하전]]이 했다는 설도 있다. --물론 둘 다 안동 김씨를 고깝게 본 것은 맞다.--] 당연히 가만있을 리 없던 세도가들은 이를 오히려 역공의 기회로 삼았다. 대사헌 서대순(徐戴淳)을 시켜 경평군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으며 아예 [[신하]]들에게 경평군을 [[사형]]시키라고 까지 권하라고 부추겼다.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철종(조선)|철종]]은 어쩔 수 없이 경평군을 결국 [[한성부|한성]] 밖으로 쫓아냈다. 하지만 대간들은 탄핵을 끈질기게 계속했다. '''결국 같은 해 11월 4일 풍계군의 양자에서 [[파양]]당했다. [[왕족]] [[신분]]으로 받은 경평군은 즉시 폐작되었으며 이름 역시 종친 자격으로 얻은 이호에서 예전 이름 이세보로 돌아갔다.''' 여담으로 다시 대가 끊어진 [[은전군]] - [[풍계군]]의 후사는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손 [[완평군|완평군 이승응]]이 새로 입양와서 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GsBdWECtlI)]}}} || || {{{#ffffff '''완도군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이세보의 눈물〉 '''}}} || 이후 [[전라남도]] [[강진군]]의 [[신지도]]로 [[유배]]를 떠났다. 유배지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수많은 [[책]]과 [[시조(문학)|시조]]를 썼다. 대표적으로 일기인 《[[신도일록]]》과 시조집인 《[[풍아]]》 등이 있다. 자세한 것은 각 문서 참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174837833_2.jpg|width=100%]]}}} || || {{{#ffffff ''' 이세보 문학 기념비 '''}}} || [[시조(문학)|시조]]의 소재는 [[부정부패]] 비판과 [[애정]], [[도덕]], [[기행]], 옛 일에 대한 고찰(考察), 그리고 [[여행|여행지]]를 두루 지나며 느낀 감흥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주제와 내용의 다양함은 다른 시조와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세보 시조만의 독특한 모습이다. 이렇게 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조들을 많이 썼기에 현재 신지도를 관할하는 [[완도군]]에선 완도읍 장좌리 수석공원에 이세보 문학 기념비를 세워 그의 문학성을 기리고 있다. 참고로 신지도에서 적은 시조는 77수, 평생에 걸쳐 쓴 시조가 총 458수로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시조를 쓴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무렵 그가 지은 노래 《농부가》가 《2018 [[EBS]] [[수능특강]]》에 실렸다. --아마 저 걸로 이 사람 알게 된 학생들 많을 거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KR20180125061100805_02_i.jpg|width=100%]]}}} || || {{{#ffffff '''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 || 이세보가 [[유배]]온 뒤 서울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한 맺힌 눈물을 흘리던 모래사장이 있었다. 이세보가 나중에 서울로 돌아간 뒤 그 곳 모래를 밟을 때마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해서, 이름이 명사십리('''鳴'''[* 울 명.]沙十里)[* 울음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린다는 뜻.], ‘울모래(鳴沙場)’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 고종 즉위 이후 === 유배지에서 고생을 하던 중 1863년(고종 즉위년) 12월[* 양력 1864년 1월.]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즉위하며 [[안동 김씨]] [[세도정치|세도]]의 절정기는 막을 내렸고 곧 [[신정왕후 조씨]]와 [[흥선대원군]]의 배려로 풀려났다. 이후 이세보는 1865년(고종 2년)에 벼슬 생활을 다시 시작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한성부우윤 · 한성부좌윤[* 지금의 서울특별시 부시장 격.]이 되었고, 1866년(고종 3년)에 병조참판[* 현재의 [[대한민국 국방부]] 차관 격.] · 동지돈녕부사[* 종친부에 속하지 않는 왕의 친족을 관리하던 곳인 돈녕부의 수장.] · 형조참판[* 현재의 [[대한민국 법무부]] 차관 격.] · 공조참판[* 현재의 [[국토교통부]] 차관 격.]을 지냈다.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내린 종친 항렬자 통일령으로 이름을 이인응(李寅應)으로 개명했다. 그 뒤로도 여주목사[* 현재의 여주시장 격.] · 오위도총부 · 한성부판윤[* 현재의 [[서울특별시장]] 격.] · 공조판서[* 현재의 [[국토교통부]] 장관 격.] · 형조판서[* 현재의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격.] · 판의금부사[* 의금부를 총괄하는 관직이며, 품계는 종1품이다. 주로 6조의 판서나 좌우참찬, 좌우찬성이 겸직했고 또 우의정이 판의금부사를 겸직하기도 했다. 주로 의금부를 총괄하며 위급한 사건을 수사할 때 왕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등 고위 관직을 두루 지냈다. 특히 여주목사 등 지방관을 지낼 때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여 민심을 얻기도 했다. 그가 떠날 때는 백성들이 제발 가지말라고 애원했다고. == 사망과 이후 == 1895년(고종 32년) 10월에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자 이인응은 크게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했다. 그러다 중병에 걸려 1896년([[건양]] 원년) 1월 7일, 향년 6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묘소는 [[충청남도]] [[천안시]] 거재마을에 있다. 1997년 7월에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문화체육부]][*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그를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 대중매체에서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풍운 경평군.png|width=100%]]}}} || || {{{#ffffff ''' 〈풍운〉의 이인응 '''}}} || 1982년 [[KBS1]] 〈[[풍운(KBS)|풍운]]〉에서는 반문섭이 연기했다. 철종([[임혁]] 분)의 병이 깊어지자 [[경원군(1842)|이하전]]([[김봉근(배우)|김봉근]] 분)을 찾아가 시국을 논하며 다음 보위는 그가 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하전은 [[흥선대원군|흥선군]]([[이순재]] 분)을 찾아가라 하는데 경평군은 궁도령, 상갓집 개와 무슨 의논을 하냐며 역정을 냈다. [[김병기]]([[김진해]] 분)의 행차를 보고 침을 뱉으며 [[안동 김씨]] 가문을 욕했는데, 이 때 옆에 있던 행인과 말싸움을 하다가 위에 소개한 말[*A "이 나라가 김씨의 나라인가 이씨의 나라인가!"]을 살짝 각색한 "김가가 어디 왕족이라더냐!"란 말을 한 뒤 행인에게 얻어맞고 하옥당했다. 이후 조정의 일을 험담하고 백성들을 충동질했다는 죄목으로 위리안치 형벌을 받았다. [[고종(대한제국)|고종]] 즉위 후엔 [[한성부]]로 돌아와 흥선대원군에게 척신들을 척결하는 일을 맡겨달라고 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를 멸문까지 할 생각이 없었던 흥선대원군은 그를 우승지에 봉했고 이에 이세보는 반발했으나 씹혔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평군 이호.jpg|width=100%]]}}} || || {{{#ffffff ''' 〈조선왕조 500년 - 대원군〉의 이인응 '''}}} ||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조선왕조 500년 - 대원군]]〉에서는 이동신[* 〈[[제4공화국(드라마)|제4공화국]]〉에서 박선호, 〈[[무신(드라마)|무신]]〉에서 [[살리타이]] 역을 맡았다.]이 연기했다. 왕실 종친일 때도 이름이 이세보로 나왔다.[* [[한국 사극]]은 특별히 중요한게 아니라면 시청자의 몰입을 해치지 않기 위해 인물의 개명을 잘 반영하지 않는다. 고증대로면 [[이성계]]도 즉위 후 '이단'으로, [[이방과]]도 '이경'으로 바꿔야하지만 그러지 않는 것처럼.] 역사대로 [[안동 김씨]]와 대립하며 [[파락호]] 생활을 하는 [[흥선군]]([[임동진]] 분)을 찾아가 종친의 품위를 지키라고 역정을 냈다. 여기서는 안동 김씨들이 종친들의 대궐 출입을 제한하려 하자 이에 반발해 위에 소개한 말[*A]을 살짝 각색한 "김가 성으로 이씨 왕실을 짓누르려 하는가!"란 말을 하여 [[귀양]]을 가는 것으로 묘사했다. [[유배]] 길에서 마주친 흥선군에게 "백성들도 다 아는 걸 대감만 모르는게 말이 되오이까!" "나라가 망하는 걸 보고만 계실 것이오이까!", "지금 나서지 않으면 천벌 받을 것이오!"라며 읍소했다. [[고종(대한제국)|고종]] 즉위 후엔 [[한성부]]로 돌아왔다. 여담으로 [[철종(조선)|철종]]([[최수종]] 분)이 경평군을 '형님'으로 불렀는데 실제로는 경평군이 1살 아래이기 때문에 오류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찬란한 여명 경평군.png|width=100%]]}}} || || {{{#ffffff ''' 〈찬란한 여명〉의 이인응 '''}}} || 1995년 [[KBS 1TV|KBS1]]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임병기]]가 연기했다. [[병인양요]] 당시 병조판서로서 흥선대원군([[변희봉]] 분) 및 기타 대신들과 대책을 논의하는 장면에서 나왔다. == 후손과 일족 == 부인으로 4살 연상의 [[연안 김씨]]와 동갑인 [[반남 박씨]]가 있었다. 그러나 자식이 없어서 16촌 동생 뻘인 이원응(李元應)[* 이인응은 능원대군의 4남 영춘군의 7대손이고 이원응은 능원대군의 장남 영풍군의 7대손이다.]의 아들 이재형(李載馨)을 [[양자(가족)|양자]]로 삼아 대를 이었다. 이재형은 남대문교회와 승동교회의 담임[[목사]]를 지냈다.[[http://seungdong.or.kr/tong/s_board/read.asp?board_seq=15&board_sub_seq=2&view_sub_seq=0&seq=1874&lef=05&sublef=undefined&page=1&search_select=&search_text=|#]]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lgofkddltpqh.png|width=100%]]}}} || || {{{#ffffff '''이인응 일족 사진. 가운데 흰 수염을 기른 사람이 이인응의 양자 이재형이고 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해랑이다.[* [[https://weekly.hankooki.com/lpage/culture/201810/wk20181014184657146860.htm|사진 출처 - 《주간한국》.]]] '''}}} || 참고로 그의 친사촌동생 이종응(李宗應)[* 이인응과 이종응은 원래 친 사촌 사이인데 이인응의 숙부이자 이종응의 아버지 이문화가 자신의 숙부 이제은의 양자로 입양갔기에 법적으로는 6촌 지간이다.] 역시 아들이 없어 이인응의 양자인 이재형의 친동생 이재영(李載榮)을 입양했다. 이재영의 손자가 [[한국]] [[연극]]의 1세대로 연극계의 대부로 유명한 배우 [[이해랑]]이다. 쉽게 말하면 이인응에게 이해랑은 4촌의 양증손자이다. [[분류:1832년 출생]][[분류:1896년 사망]][[분류:전주 이씨 능원대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