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원대}}}'''[br]'''李元大[* 호적상 이름이다. 본명은 李'''{{{+1 原}}}'''大로 표기한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원대(독립운동가).png|width=100%]]}}} || ||<-2> 1936년 1월 27일 모 경찰서 고등형사과에서 복사한 사진.[br]소학교 졸업 사진으로 추정된다. || || '''이명''' ||공문덕(孔文德), 마덕산(馬德山) || || '''자 / 호''' ||달문(達文) / 덕산(德山) || || '''본관''' ||[[경주 이씨]] || ||<|2> '''출생''' ||[[1911년]] [[12월 29일]] || ||[[경상북도]] [[영천시|신녕군]] 지곡면 운산동[br](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운산마을)[*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진영(1907)|이진영]]은 이웃 마을인 운산마을 출신이며, 독립유공자 [[조병진]]과 [[조재복]]은 이웃 마을인 월지마을 출신이다.][[http://yeongcheon.grandculture.net/yeongcheon/toc/GC05101417|#]] || ||<|2> '''사망''' ||[[1943년]] [[6월 17일]] (향년 31세)|| ||[[중화민국]] [[베이징시]] || || '''학력''' ||백학학원 {{{-2 (수료)}}}[br]자천공립보통학교[* 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0942&docId=1175782&categoryId=37713|자천초등학교]].] {{{-2 (졸업 / 1회)}}}[br]영천공립농업보습학교[* 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0942&docId=1180848&categoryId=37713|영천중학교]].] {{{-2 (중퇴)}}} || || '''묘소'''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선영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일제강점기에 독립군 및 공작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11년 12월 29일, 이원대는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운산동(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동 운산마을)의 부농가에서 아버지 이중호(李重鎬)와 어머니 정오동(鄭梧桐) 사이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21년 백학학원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1922년 자천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자 편입하여 1928년 1회로 졸업했다. 이후 영천공립농업보습학교에 진학했으나 1학년을 수료한 뒤 중퇴하고 본가로 돌아왔다. 어릴 적부터 정의롭고 외골수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던 그는 줄곧 성인이 되면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의를 다졌었는데, 마침 친한 사이인 안병철의 권유를 받고 고향 친구인 [[이진영(1907)|이진영]]과 함께 1933년 8월 중국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안병철(安炳喆)은 중국에서 조선혁명군 간부 1기로 졸업한 인물인데 동기로 [[이육사]]가 있었다. 그는 2기 학생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잠입한 의열단 공작원이었기에 정의롭고 의협심이 넘치는 이원대를 보고 적임자라고 판단했던 것. 이렇게 의열단과 중국이 협력하여 세운 간부학교에 들어가 6개월동안 군사학, 철학, 정치학 등을 배웠다. 그 후 [[김구]]의 부탁을 받고 졸업을 앞둔 채로 14명의 동기와 한인 특별반에 입교했다. 한인특별반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획했던 단체였다. 한인특별반까지 마친 이원대는 특파공작원이 되어 난징과 상하이 등지에 중국과 협력하여 정탐, 암살, 시설파괴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김원봉]]이 개편된 조선의용대에 청년장교들을 편성할 때 이원대도 초급장교로 거기에 포함되어 한중 연합작전을 전개하는 데 참여했다. 이원대는 50여 차례의 전투를 겪었다. 1942년에는 일본군이 팔로군을 소탕하기 위해 마전 전투를 벌였고 그는 일본군의 포위를 뚫고 역으로 포위하여 타격을 입히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포로로 잡히고, 베이징시에 있던 일본군 헌병대 본부에서 석 달동안 고문을 당했다. 그 뒤 전쟁통에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하고 앓다가 1943년 6월 17일 총살형으로 [[http://www.kbsm.net/news/view.php?idx=247445|순국했다]]. 사후 1977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 참고 자료 ==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130~132p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1911년 출생]][[분류:1943년 사망]][[분류:영천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이씨]][[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총기에 죽은 인물]][[분류:의열단/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