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368년 출생]][[분류:1429년 사망]][[분류:고성 이씨]][[분류:고려의 인물]][[분류:조선 좌명공신]][[분류:조선의 문관]][[분류:좌의정]][[분류:우의정]] [include(틀:역대 조선 정승(태조-연산군))] [include(틀:조선 좌명공신)] ||<-2> '''[[정승|{{{#f0ad73 조선 정승}}}]][br]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양헌공(襄憲公)[br]{{{+1 이원}}}[br]李原''' || || '''출생''' ||[[1368년]] [[1월 31일]][* [[율리우스력]] [[1월 23일]].][br](음력 [[공민왕]] 17년 1월 4일)|| || '''사망''' ||[[1429년]] [[7월 29일]][* [[율리우스력]] [[7월 20일]].] (향년 61세)[br](음력 [[세종(조선)|세종]] 11년 6월 19일)|| || '''[[봉호|{{{#f0ad73 봉호}}}]]'''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1426년]](세종 8) 삭탈, [[1456년]](세조 2) 복권.]|| || '''[[시호|{{{#f0ad73 시호}}}]]''' ||양헌(襄憲)|| || '''[[본관|{{{#f0ad73 본관}}}]]''' ||[[고성 이씨]]|| || '''[[자(이름)|{{{#f0ad73 자}}}]]''' ||차산(次山)|| || '''[[아호|{{{#f0ad73 호}}}]]''' ||용헌(容軒)|| || '''부모''' ||부친 - 이강(李岡)|| || '''부인''' ||[[양천 허씨]] - 허금(許錦, {{{-3 1340 ~ 1388}}})의 딸[br][[전주 최씨]] - 최정지(崔丁智)의 딸|| || '''자녀''' ||장남 - 이대(李臺) {{{-3 허씨 소생}}}[br]장녀 - 서산 류씨(瑞山柳氏) 류방선(柳方善, {{{-3 1388 ~ 1443}}})의 처 {{{-3 허씨 소생}}}[br]차남 - 이곡(李谷) {{{-3 최씨 소생}}}[br]3남 - 이질(李垤) {{{-3 최씨 소생}}}[br]4남 - 이비(李埤) {{{-3 최씨 소생}}}[br]5남 - 이장(李塲) {{{-3 최씨 소생}}}[br]6남 - 이증(李增) {{{-3 최씨 소생}}}[br]7남 - 이지(李墀, {{{-3 ? ~ 1486}}}) {{{-3 최씨 소생}}}[br]차녀 - [[파평 윤씨]] 윤삼산(尹三山, {{{-3 1406 ~ 1457}}})[* [[성종(조선)|성종]]의 2계비 [[정현왕후]]의 조부.]의 처 {{{-3 최씨 소생}}}[br]3녀 - 이굉식(李宏植)의 처 {{{-3 최씨 소생}}}[br]4녀 -영원군부인(寧原郡夫人, {{{-3 1410 ~ 1491}}}) [[안동 권씨]] [[권람]]의 처 {{{-3 최씨 소생}}}[br]5녀 - 황종형(黃從兄)의 처 {{{-3 최씨 소생}}}||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관료, [[정승]]이다. 그의 아들들이 [[고성 이씨]] 둔재공파를 비롯한 여러 파의 중시조가 되었다. == 생애 == 신도비에 따르면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바람에 누이인 [[권근]]의 부인과 자형인 권근이 자주 보살펴주었다고 하며, [[1382년]](우왕 8)에 진사가 되고, [[1385년]](우왕 1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종(조선)|정종]] 시절 우부승지에 오른 후 [[2차 왕자의 난]] 때 [[태종(조선)|태종]]에게 협력하여 [[공신#s-1.2.3|좌명공신]]이 되고 본관인 고성의 다른 이름인 철성(鐵城)의 이름을 딴 작위를 받았다. [[1402년]](태종 2)에 [[명나라]]에서 [[영락제]]가 새로이 황제가 되자, 태종이 [[건문제]]에게 받은 고명을 [[1403년]]에 반납하고 다시 받아올 때 사신으로 뽑혀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조선)|세종]]이 등극한 다음에도 고명을 받으러 다녀오기도 하고, 이후에도 한 번 더 명나라에 가는 등 명나라와의 외교와 인연이 깊었다. [[1418년]](태종 18) 우의정을 거쳐 [[1421년]](세종 3) [[좌의정]]이 되었다. [[1426년]](세종 8) 김도련(金道練) 노비 불법 증여 사건에 연루된 데다,[* [[세종(조선)#재위기간]] 문서 재위기간 문단 참조.] 이전에 부유한 상인의 딸을 두고 남과 다투다 태종의 중재를 무시하고 그녀를 몰래 첩으로 삼은 일까지 조사 과정에서 드러나면서 공신 녹권(錄券)과 [[고신#s-1]]이 회수되고 [[익산시/행정#여산면|여산]]으로 유배되어 4년 뒤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위인 [[권람]]이 [[세조(조선)|세조]]에게 협력하여 [[공신]]이 되자 그의 고신은 [[1455년]](단종 3)에, 공신 녹권은 [[1456년]](세조 2)에 환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