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제3대 국회의원/경상남도)] [include(틀:제4대 국회의원/경상남도)] [[파일:external/rokps.or.kr/455.jpg|width=150]] 李龍範[* [[아명]]은 이범이(李範伊)로, [[1936년]]에 이용범으로 [[개명]]하였다.] [[1905년]] [[음력]] [[10월 30일]][* [[양력]] [[11월 26일]].] ~ [[1968년]] [[7월 20일]] (향년 62세)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정치인]]. == 생애 == 1905년 음력 10월 30일(양력 11월 26일) [[경상남도]] [[창원군]] [[동읍|동면]](현 [[창원시]] [[의창구]] [[동읍]]) 석산리의 빈곤한 가정에서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1528|태어났다]]. 태어난 지 1년이 채 안 되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이후 [[김해군]] [[진영읍|진영면]](現 [[김해시]] [[진영읍]])으로 이주하였으며, 가정 사정 탓에 학교는 다니지 못했고 독학하였다. 1923년 [[일본]] [[규슈]]로 건너가 20년 동안 탄광의 인부로 생활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강원도]]에 터를 잡고, 지하자원 개발에 종사해 10년 만에 광산 40곳의 광업권을 획득했다. [[8.15 광복]] 후 500만 원의 자금으로 대동공업주식회사 및 극동연료회사를 설립하여 토목건축, 하역, 물류, 철공, 제재, 지하자원 개발 등의 사업을 하였다. 특히 대동공업주식회사 출장소를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부]]에 두고 부산부내나 근교에 주둔하는 [[주한미군]] 부대의 건설을 도맡다시피 하여 큰돈을 벌었다. [[6.25 전쟁]] 때 장비를 사 모았고, 전쟁이 끝나자 전국의 재해 복구 시설의 절반을 도맡아하였다. 이 사이 [[이기붕]]과 친해지게 되었고, 많은 액수의 돈을 [[자유당]] 정치 자금으로 내놓으면서 토건업으로 벼락부자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정부 공사나 이권에 개입하였다는 지적이 더러 있었다. 이후 [[자유당]]에 입당했고, 경상남도당 부위원장을 거쳐 위원장에 취임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 창원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무소속 [[김봉재(1910)|김봉재]]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대동육영회 [[이사장]], 자유당 중앙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임기 중이던 1957년 4월 18일부터 4월 26일까지 창원군 관내 쌀이 떨어져 밥을 먹지 못하던 농가들을 조사한 뒤 사재 400만 환을 들여 집집마다 쌀 1백석씩 지급했고, [[북면(창원)|북면]], [[진전면]] 관내 각 중학교와 창원군 관내 국민학교의 육성을 위해 총 600만 환을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570422000032|기부하기도 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 창원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봉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1년 [[3.15 부정선거]] 가담을 이유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정축재 혐의로 기소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제정한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1962년 1월 11일, 대동공업회사 및 극동연료회사를 경영하면서 1954년부터 1959년까지 5년간에 걸쳐 이중장부를 작성해 9억 7천여 만 환의 [[조세포탈]]을 통해 부정축재를 한 점, 그리고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창원군 을 선거구에서 [[무투표 당선]]되기 위하여 [[민주당(1955년)|민주당]] 측 입후보자 [[설관수]]의 등록을 방해하고 투표권을 박탈하는 등의 혐의에 대해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및 부정축재처리법 등이 적용되어 [[무기징역]]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201110023920302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2-01-11&officeId=00023&pageNo=3&printNo=12483&publishType=00020|구형되었다]]. 이후 1962년 1월 20일 [[혁명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201230023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2-01-23&officeId=00023&pageNo=1&printNo=12495&publishType=00020|선고받았고]], 1962년 3월 31일 상고가 기각되어 원심 판결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2033100329203016&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62-03-31&officeId=00032&pageNo=3&printNo=5030&publishType=00020|확정되었다]]. 그러나 1963년 5월 8일 [[특별사면]]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3050800209207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05-08&officeId=00020&pageNo=7&printNo=12776&publishType=00020|받고]] 출소했다.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에는 정치활동금지에서도 해금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1963년)|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 [[진해시]]·창원군 [[지역구]]에 출마하였다가 중도 사퇴하였다. 한편 [[학교법인]] 창원학원을 설립한 뒤 [[이사장]]에 취임하여 사재를 쾌척해 창원대산중학교, [[창원대산고등학교]], [[창원중학교]], [[창덕중학교]], 창원진전중학교 등을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570422000032|설립했다]]. 그리고 부산동주학원 이사장도 지냈다. 1968년 7월 2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282번지 자택에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807220032920802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8-07-22&officeId=00032&pageNo=8&printNo=7011&publishType=00020|사망했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종류 || 선거구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54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 경남 창원군 을[* 제21선거구] ||<|2> [include(틀:자유당)] || '''25,626표 (61.29%)''' ||<|2> '''당선 (1위)''' || '''초선''' || || 1958 || [[제4대 국회의원 선거]] ||<|2> 경남 창원군 을[* 제29선거구] || '''25,561표 (67.86%)''' || '''재선''' ||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include(틀:무소속)] || 5,067표 (15.28%) || 낙선 (4위) || || || 1967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경남 진해시·창원군[* 제5지역구] || [include(틀:자유당(1963년))] ||<-2> 후보 사퇴 || || == 관련 문서 == * [[정치인/목록]] [[분류:1905년 출생]][[분류:의창구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남성 기업인]][[분류:기업인 출신 정치인]][[분류:1968년 사망]][[분류:제3대 국회의원]][[분류:제4대 국회의원]][[분류:자유당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