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431년 출생]][[분류:459년 사망]][[분류:농서 이씨]]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고장목후(姑臧穆侯)[br]{{{+1 李承 | 이승}}}''' || || '''시호''' ||목(穆) || || '''작위''' ||고장후(姑臧侯) || || '''성''' ||이(李) || || '''이름''' ||승(承) || || '''자''' ||백업(伯業) || || '''생몰''' ||431년 ~ 475년 || || '''부친''' ||[[이보(북위)|이보]](李寶) || || '''본관''' ||농서군(隴西郡) 적도현(狄道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북위]]의 관료로 자는 백업(伯業). [[서량]]의 초대 국왕 [[이고(서량)|이고]]의 증손으로 [[이보(북위)|이보]]의 장남이다. == 생애 == 이승은 어린 시절부터 책략이 있었다. 아버지 이보가 북위로의 귀순을 계획할 때 반대하는 백성과 관료들이 많았는데, 이승은 이때 이보에게 대계를 빨리 정하라고 설득해서 이보는 결국 북위에 귀순했다. 442년, 이승은 숙부 이회달과 함께 북위에 인질로 보내졌다. 북위의 [[태무제]] 탁발도는 이승을 매우 중시하여 고장후(姑臧侯)라는 작위를 내렸다. 459년, 이보가 죽은 뒤 장례를 치르면서 효성으로 알려졌다. 이승은 아버지의 작위인 돈황공(敦煌公)을 습봉해야 했지만 자신이 이미 고장후라는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작위를 동생인 이무(李茂)에게 양보해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이승은 방정하고 관대했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재능이 있어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매우 중시되었다. [[문성제]]의 치세 말에 이승은 용양장군(龍驤將軍), 형양태수(滎陽太守)로 전출되어 엄격하고 공정한 통치를 펼쳐서 명성을 떨쳤다. 이승은 475년에 죽어서 사지절(使持節), 용양장군,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추증되었고 목(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보는 슬하의 아들로 이소(李韶), 이언(李彦), 이건(李虔), 이유(李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