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의열단)]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수택}}}'''[br]'''李壽澤'''}}}}}} || || '''이명''' ||이각(李覺) || || '''자 / 호''' ||덕윤(德潤) / 일몽(一夢) || || '''본관''' ||[[광주 이씨]] (廣州 李氏)[*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첨정공파 21세 수(壽) 항렬.] || ||<|2> '''출생''' ||[[1891년]] [[2월 17일]] || ||[[경상도]] [[칠곡군|칠곡도호부]] 파미면 이동[br](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바위마을)[* 인근의 매원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항진(1916)|이항진]]도 이 마을 출신이며, [[이수일]]은 관터마을 출신이다.] || ||<|2> '''사망''' ||[[1927년]][*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24년에 별세한 것으로 오기되어 있다.] [[7월 4일]] (향년 36세)||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바위마을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88호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이항진(1916)|이항진]]은 그의 [[조카]]이다. == 생애 == 이수택은 [[1891년]] [[2월 17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이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바위마을]에서 아버지 이정환(李珽煥)과 어머니 [[광산 김씨]] 김기(金沂)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약목면 소재 동락의숙(同樂義塾)과 [[경성부]] 소재 보혜학교(普惠學校)에서 수학하였다.[[http://chilgok.grandculture.net/chilgok/toc/GC02300741|#]] 그는 [[1913년]] [[경상남도]] [[밀양군]]에서 항일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했으나 동지들이 체포되어 활동을 중단하였으며, 같은 해 [[경상북도]] [[풍기군]]에서 [[채기중]]·[[한훈]]·[[유창순(독립운동가)|유창순]]·[[유장렬]] 등과 더불어 광복단(光復團)을 결성하여 군자금 모금 및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 [[박중화]] 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같은 해 [[11월 10일]] [[길림성]] [[지린시|길림현]]에서 [[김원봉]]·[[곽재기]]·[[이종암]]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였으나, 그해 겨울 모친의 병환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후 국내에서 자금 조달과 무기 관리를 맡았으며, [[1920년]] 3월 곽재기·이성우(李成宇) 등과 더불어 [[밀양군]]과 [[김해군]] [[진영읍|하계면]](下界面)[* [[1928년]] 진영면으로 개칭했다.]의 주요기관을 폭파하려고 [[폭탄]]과 [[권총]]을 밀반입하려다가 발각되자, 피신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1920년]] 12월 이종암·구영필(具榮泌)·[[김상윤(1897)|김상윤]] 등과 더불어 밀양경찰서를 폭파할 계획을 모의하고, 같은 달 27일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순사부장(巡査部長)에 상처를 입혀 죽게 하였다. 이 사건 직후 피신한 그는 [[부산부]]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벙어리]] 행세를 하여 7일만에 석방되었다. 그후 계속 의열단원으로서 활동하던 중 이종암·김상윤·[[서상락]] 등과 군자금을 모금하려다 [[1924년]] [[1월 25일]] [[일본제국 경찰|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및 [[다이쇼]] 8년([[1919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41&evntId=0034974858&evntdowngbn=Y&indpnId=000000703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2월 19일]]경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77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2070&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끝내 그해 [[7월 4일]] [[칠곡군]] 자택에서 37세의 나이로 [[http://db.history.go.kr/id/su_008_1927_07_04_0180|순국하였다]]. 같은 달 10일에는 왜관면 각 사회단체의 연합장으로 거행될 예정이었으나, 일제 당국의 금지로 간소하게 치러졌다.[[http://db.history.go.kr/id/su_008_1927_07_10_0390|#]] [[8.15 광복]] 후 [[1951년]] [[12월 9일]] [[보건복지부|사회부]]에서 그의 유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였다.[[http://db.history.go.kr/id/dh_023_1951_12_03_0140|#]]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77년]] 건국포장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861|#]]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7년]] [[5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광주 이씨]][[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1891년 출생]][[분류:192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의열단/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