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이수광(李睟光)''' || ||<:> '''출생''' ||<(>[[1563년]] [[조선]] || ||<:> '''사망''' ||<(>[[1628년]] [[조선]]|| ||<:> '''본관''' ||<(>[[전주 이씨]] || ||<:> '''자''' ||<(>지봉(芝峯) || ||<:> '''호''' ||<(>문간(文簡) || ||<:> '''가족관계''' ||<(>부 이희검[* 병조판서를 지냈다.] || [목차] == 개요 ==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이며, 그 중에서도 [[남인]] 실학파의 토대가 된 인물이다. 다만 이수광 본인은 당색에 치우치지 않은 관계로 [[인조반정]] 이후에도 [[당상관]]으로서 중용되어 [[서인]] 계열의 견제를 받지 않았다. == 생애 == [[태종(조선)|태종]]의 서자 [[경녕군]] 이비의 5대손으로 1563년 조선의 수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585년]] 젊은 나이에 [[과거제도|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냈다. 관직에 있는 동안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 다양한 난을 겪었다. 명나라에도 3번이나 파견되었다. [[이조판서]]로 재직하던 중 1628년 사망하였으며,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이수광은 뛰어난 외교력과 문장 능력을 인정받아 28세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35세 때 진위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며, 49세 때인 1611년에도 중국을 다녀왔다. 당시의 세계적인 [[선진국]] 명나라에서 그 문화를 보고 배우는 한편, 세 차례의 사행 기간 중에 [[베트남]], [[시암]], [[류큐 왕국]]의 사신들과 교류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실제로 중국에서 베트남 사신 풍극관과 교류하여 풍극관이 베트남에 이수광의 시를 소개해 유행하였다고 한다. 이런 다양한 경험과 풍부한 지식을 토대로 1614년에 전근대 동양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유서#s-2|유서]] [[지봉유설]]을 써서 오늘날까지 명성이 높다. 이수광에 대한 [[인조실록]]의 졸기(卒記)에는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안남]], [[류큐|유구]], [[태국|섬라]]의 사신들이 그의 시문을 구해보고 그 시를 자기 나라에 유포시키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후대 조선 사신들에게 이들 지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서 조선 사람이라면 이수광이라는 사람이 유명한데 그 사람을 아느냐?"면서 문의한 적이 있을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이 있었다. == 평가 == 그의 사상은 영의정에까지 오른 장남 이성구와 성리학자 겸 실학자였던 차남 이민구[* [[김경징]]과 함께 [[강화도 방어전]]을 말아먹으신 그분이다.(...)], [[허목]]을 통해 [[윤휴]](이민구의 문인이다), [[유형원]], [[이서우]], [[이익(실학자)|이익]], [[채제공]], [[정약용]] 등에게로 이어졌고 남인 실학파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지봉유설을 통해 당대 중국에서 유통되던 다양한 학문 서적을 조선에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중에선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도 있다. [[분류:1563년 출생]][[분류:1628년 사망]][[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실학자]][[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시인]][[분류:서예가]][[분류:전주 이씨 경녕군파]][[분류: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