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328년 출생]][[분류:1396년 사망]][[분류:영덕군 출신 인물]][[분류:고려의 성리학자]][[분류:한산 이씨]][[분류:대한민국의 객사한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의문사한 인물]] [include(틀:고려의 문하시중)] [include(틀:고려삼은)] ||<-2> '''[[조선|{{{#f0ad73 조선}}}]] 한산백(韓山伯) 문정공(文忠公)''' || ||<-2> '''[[문하시중|{{{#670000,#fedc89 고려 문하시중}}}]][br]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br]{{{+1 이색}}}[br]李穡'''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색 초상.jpg|width=100%]]}}} || ||<-2> {{{#670000,#fedc89 {{{-2 이색 표준 영정 (?년, ? 作, [[대한민국의 보물|대한민국 보물]] 1215호)}}}}}} || || '''출생''' ||[[1328년]] [[6월 25일]][* [[율리우스력]] [[6월 17일]].][br](음력 [[충숙왕]] 15년 5월 9일)|| || '''사망''' ||[[1396년]] [[6월 20일]][* [[율리우스력]] [[6월 12일]].] (향년 67세)[br](음력 [[태조(조선)|태조]] 5년 5월 7일)|| || '''[[봉호|{{{#670000,#fedc89 봉호}}}]]''' ||한산부원군(益陽府院君)^^고려^^[br]한산백(韓山伯)^^조선^^|| || '''[[시호|{{{#670000,#fedc89 시호}}}]]''' ||문정(文靖)^^조선^^|| || '''[[본관|{{{#670000,#fedc89 본관}}}]]''' ||[[한산 이씨]][* 한산 이씨 시조 이윤경의 7대손.]|| || '''[[자(이름)|{{{#670000,#fedc89 자}}}]]''' ||영숙(穎叔)|| || '''[[아호|{{{#670000,#fedc89 호}}}]]''' ||목은(牧隱)|| || '''가족''' ||{{{-2 아버지}}} [[이곡]][br]{{{-2 어머니}}} [[함창 김씨]][br]{{{-2 배우자}}} [[안동 권씨]][br]{{{-2 장남}}} 이종학(李種學)[br]{{{-2 차남}}} 이종선(李種先)||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후기의 [[문인]].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고려삼은]](隱)'''이라 불린다.[* 사람에 따라 길재를 빼고 도은 [[이숭인]]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익재 [[이제현]] 밑에서 공부했으며 [[성리학]]을 연구했고 문하에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남재]], [[권근]], 길재, [[이첨]], [[하륜]], [[윤소종]], [[염흥방]] 등 사실상 [[여말선초]] 거의 모든 [[사대부]]들을 키워 낸 인물. 자신의 [[제자]]인 권근, 정몽주, 길재 등을 통하여 후일 [[관학파]][* [[정인지]], [[신숙주]], [[최항(조선)|최항]] 등 훗날 일부 관학파 출신들이 변절하여 [[세조(조선)|수양대군]]을 [[계유정난|도와]] [[공신#s-1.2.4]]이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훈구파]]다.]와 [[사림파]]가 형성되었기에 그 계보에서 거의 최상단에 있는 인물로 [[신진사대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괜히 '''[[사대부]]의 아버지'''가 아니다. == 생애 == [youtube(qEifIZB0q80)] 아버지는 성리학맥에 있어 이제현의 뒤를 이었다고 평가받는 이곡(李穀)이다. 이곡이 복주(지금의 안동)에 부임하여 사록참군사(事錄參軍事) 벼슬을 할 때, 영해 지역 토호였던 함창김씨(咸昌金氏) 진사(進士) 김택(金澤)의 딸과 혼인하여 외가가 있던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서 출생했다. 고려에서 진사시에 합격한 뒤 [[원나라]]에 건너가 원나라 [[국자감]]에서 처음 성리학을 배워서 연구하였고 이후 원나라에서 [[과거 제도|과거]] 시험을 쳐 회시에서 장원으로 급제, 전시[* 최종 시험. [[임금]] 앞에서 시험을 침.]에서는 2등[* 이색은 전시에서 1등의 성적을 얻었으나 이색은 원나라인이 아닌 [[외국인]]인 까닭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 때 1등 합격자는 우계지(牛繼志)이다.]으로 합격했다.[* 당시 원나라의 과거 시험은 이후 명청대처럼 정기적으로(식년시:3년마다 실시, 그외 특별 시험이 종종 있음)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불규칙적으로 드문드문 시행했고 선발 인원 또한 극소수였다.] 앞서 [[통일신라]] 시기 [[최치원]], [[최승우]] 등도 [[당나라]]에서 급제했다고 하지만 외국인 대상의 [[빈공과]]에 합격한 것이므로 다소 격이 떨어지는데 비해 이색의 전시 2등은 그야말로 [[클라스]]가 다른 어마무시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후 원나라에서 [[벼슬]]을 살다가 어머니의 연로함을 이유로 [[귀국]]했다. 고려에 돌아와서 처음 한 일이 [[무신정권]]기의 잔재였던 [[정방]]의 폐지. [[공민왕]] 때 [[토지]] 제도 개혁, [[불교]] 억제 등의 [[상소]]를 올렸으며 1388년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자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옹립하는 것에 가담했다. 이후 창왕 폐위 때 이성계 일파에게 [[관리]]들의 토지를 빼앗아 분배하자는 토지 [[개혁]]에 반대한다는[* 이색의 한계이기도 했다. 하필 이색의 집안은 신진사대부 중에서도 토지 소유량이 많은 편인지라 토지 개혁을 진행했다가는 빼앗길 토지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은 겹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권문세족 중에서도 성리학을 배우고 과거를 통해 벼슬에 올라 개혁에 찬성하면 신진사대부가 되는 것이다. 권문세족들도 [[음서]]뿐만 아니라 과거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조준도 권문세가 출신.] 이유로 밀려 [[귀양]]을 갔다가 [[공양왕]] 때 정몽주가 [[정권]]을 잡자 [[부원군]]의 자리를 받아 '한산부원군'이라 불린다. 그러나 [[역성혁명]]에는 찬성하지 않았기에 [[태조(조선)|이성계]]로 인해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선이 건국된 후 정도전은 [[스승]]이기도 한 이색에게 냉혹한 태도를 보였고, 자연도(지금의 영종도)로 유배보내려 했다. 담당 관리가 자연도가 무인도임을 들어 난색을 표하자 "섬에 귀양보내자는 것은 바다에 밀어넣자는 것이다."라고 하며 암살계획을 짜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결정으로 [[장흥군|장흥]]으로 유배를 갔고, 후일 사면되어 한산백이 되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암살 음모를 저지하고 이색에게 각종 특전과 재물을 내리거나 잔치를 베풀어 최대한 예우하려 했으나 이색은 고려에 지조를 지키려 했고, [[오대산]]에 머물렀다. 이성계는 이색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색을 군신이 아닌 친구의 예로 대우하며 불러서 접대했을 때는 떠나가는 이색을 직접 배웅했다고 한다. 이성계가 직접 방문했는데도 "나를 개국 당시 불렀다면 예우를 차려서 자리가 빛났을 텐데, 왜 [[배극렴|말 장수]] 따위에게 일을 시켰습니까?"[* 배극렴이 옥새를 바친 장본인이기에, 이는 이성계의 즉위를 거칠게 비난하며 비웃은 것이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이색의 졸기.]같은 폭언을 내뱉어 다혈질인 [[남은]]을 격분하게 만들었고, 남은의 형인 [[남재]]는 넌지시 그의 아들 이종선에게 "공이 광언(狂言)을 내뱉어 논의하는 자가 있으니 떠나지 않는다면 화를 입을 것이다"라면서 피신을 권하고 자중할 것을 권했다. 결국 다음 해인 1396년 6월 17일 피서를 가겠다며 여강(驪江, 현재의 [[경기도]] [[여주시]])의 [[신륵사]]로 떠나던 중 배 위에서 [[객사|급사했는데]], 이를 두고 정도전의 독살로 추측하는 시각이 있지만 확실한건 아니다. 유언은 다음과 같다. >'''죽고 사는 이치를 내 의심하지 않는다.''' >'''死生之理, 吾無疑矣.''' == 평가 == 성리학맥에서 이색의 위치는 한국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 → 안향의 6군자[* [[권부]], [[백이정]] 등 6명의 제자다. 이 중의 1명이 [[이조년]]으로 [[이인임]]의 조부.] → 이제현 → 이곡 → 이색 → 정몽주 → 길재, 권근으로 이어지는데, '''조선 [[성리학]]의 정통 계보는 이색, 정몽주, 길재가 시발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색과 이색의 제자들 대부분이 [[여말선초]]에 [[난세]]의 핵심부에 위치해 있었던 점은 당시 [[성리학]]이 매우 현실 참여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수제자]]로는 일반적으로 정몽주를 들며 특히 이색은 정몽주의 강론을 듣고 '''[[정몽주]]야말로 동방이학의 비조'''라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다.[* 다만 이것은 제자를 칭찬하는 말로 이 말을 정몽주보다 [[학문]]이 뛰어나지 못 했다고 곧이 곧대로 해석해버리면 곤란하다. 물론 정몽주의 학문적 완성도는 이색보다 못 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 개국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위치나 명성에 비해서 정치적 입지는 다소 약하고 이렇다 할 정치적 업적도 없는 편인데, 실제로도 당대에 이미 "이재(= 관리의 재능)가 없다." 하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 왕조 [[세종실록]]에 보면 좋은 평가도 있지만 대체로 혹평에 가까운 편이다. 조선 초기와 중 · 말기의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로, 조선 초에는 대부분의 [[성리학]]의 전파자이자 대부분의 [[신진사대부]]가 이색의 제자였던 만큼 정치적 위치와는 무관하게 입지는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일부 급진 신진 사대부 계층에서 척불론이 강하게 일자, 불교에 대해 반감이 크게 없었던 태조는 이색을 들어 반박을 해 무마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개국공신]] 일등공신인 정총에게 대장경을 인출할 원문을 지어 바치라고 지시하자, 정총은 이에 반대하며 "[[불교]]는 왕조를 병들게 하는 악(惡)이며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거부한다. 이에 태조는 "이색도 그런 말은 안 했다. 네가 이색보다 잘났느냐!!"라고 반문했고, 결국 정총도 여기에 지고 글을 지어 바친다. 이처럼 이색은 [[정치가]]나 관리로서의 자질은 떨어졌으나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학문의 깊이 만큼은 대단히 뛰어났던 듯하다. 실제로 [[여말선초]]의 급변기를 이끌었던 대다수의 사대부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웠음을 생각해 보면 결코 과소평가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즉, 후일의 사림들처럼 정치가나 경세가의 면모까지 겸비하지는 못 했지만 전적으로 대학자로서 활약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끝까지 조선 왕조를 거부했지만 조선 왕조를 세운 세력들을 다 키워낸 '''조선의 사상적 스승'''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 중 · 후기 이후부터는 이색의 평가는 [[급전직하]]하는데, 유교의 교조화가 깊어지고 특히 불교에 대한 거부감이 나날이 심해지면서 불교와 가깝게 지냈던 이색은 더욱 비난을 받았다. 특히 여주 신륵사의 승려인 혜근(나옹선사)의 비문과 인각사 무무당기[* 이색의 문집인『목은집』「인각사 무무당기(麟角寺 無無堂記)」 中: "(상략)...불교의 화복인과(禍福因果)의 설은 사람을 다스리는 데가 있다...(중략)...나는 도대선사 서공(諝公)이 불도를 열심히 믿었기에 그의 이름이 세상에 날로 알려지고, 선행을 부지런히 하였기에 일이 쉽게 풀린 것이라 생각한다...(하략)..." 이는 정몽주와 대조되는 부분인데, 정몽주는「김초가 불교를 훼손한 죄를 사면할 것을 청하는 상소」에서 "...(상략)...신들의 생각으로는 불교를 배척함은 유학자의 떳떳한 도리이므로 예전부터 임금이 따로 두고 논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전하의 관대하신 아량은 하찮고 엉뚱한 자는 용서하실 만한 것이니, 삼가 너그러운 은혜를 베푸시어 한결같이 다 용서하시고 백성에게 믿음을 보이시길 바라나이다."라고 하며 강한 숭유억불의 의지를 드러냈다.]를 써주는 등[* 목은집 권49(목은문고 권14)] 불교와 친하게 지내곤 해서 이후 성리학자들에게 내내 까였다. 일단 비문을 써주는 대가로 절에서 후원을 많이 해줘서 풍족하게 살 수 있었지만[* 나옹선사의 비문을 써준 대가로 불교계에서 윤필료(붓을 닦은 값)를 주었는데, 사실상 돈 줄 명분이다. 이색이 너무 많이 준다고 거부하자 그 돈으로 [[암자]] 5개를 짓는 등 어마어마하게 후원해준다.] 조선이 숭유억불하는 과정에서 불교와 친하게 지냈던 이색까지 덩달아 까이게 된 것, 반대로 [[정도전]]은 젊은 시절 비문을 몇 번 써준 적은 있지만 나중에 불교와 관계를 끊고 죽을 때까지 불교를 탄압했다. 조선인들도 대체로 이색의 학문이나 인간됨에 호의를 표하였고 비극적인 개인사에 대해서도 동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다. [[용재총화]]에서는 아들인 이종학[* 정도전에게 죽었다.]의 죽음을 깊이 슬퍼했지만 트집을 잡힐까 봐 어디 가서 대놓고 슬퍼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오자 같이 말을 타자는 핑계로 깊은 숲 속까지 가서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서 날이 어두워지도록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간인 이상 [[명예]]욕이 꽤 있었던 것 같긴 하다. 이제현 사후 익재집의 서문을 작성했는데, 그 글에 100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이름이 기억될 수 있는지에 대해 걱정하는 내용을 썼다. 그리고 이름만으로 천년을 살겠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남긴 공통된 소망이라 딱히 이색만 명예욕이 꽤 강했다고 하긴 무리다.--일단 500년동안 이름 남기기는 성공했다.-- == 여담 == * 같이 문과에 급제한 [[박상충]]의 처남이기도 하다.[* 이색과 박상충은 고려 문과 1위, 2위로 급제하였다.] * 1388년 [[문하시중]]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시 이성계의 아들 [[태종(조선)|이방원]]을 소위 [[인질]] 격으로 동행하여 명나라에 함께 데려갔다. 원래는 자신이 창왕과 함께 직접 명에 입조해 왕위계승을 인정받을 생각이었는데 태후의 반대로 창왕이 가지 못하자 자신이 떠나 있을 때 이성계가 난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자신과 함께 명나라로 가자고 했으나 이성계는 그 대신 자신의 아들 이방원과 함께 가라고 달랬다. 이방원은 장남 방우나 차남 방과처럼 전주 이씨 가문의 후계자급 인물은 아니었지만 가문 내 유일한 과거 급제자로서 이성계가 가장 총애하던 아들이었기에 이색의 입장에서는 '당신이 없는 사이 선양을 받거나 찬탈을 하지는 않겠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홍무제|주원장]]이 원나라에서 과거까지 급제한 이색에게 [[중국어]]를 해보라고 했으나 주원장이 이색의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였다고[* 주원장은 인사 치레조로 "원나라에서 한림을 했다니 한어(중국어) 좀 하겠네?"라고 말을 건넸는데 이색은 "친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주원장은 못 알아듣고 옆에 있던 예부 관리가 [[통역]]을 해 주고서야 알아 들었다.]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이색은 [[원나라]]의 [[북경어]]로 말했으나 주원장이 남방 출신이어서[* 당시엔 수도도 [[난징]]이었다. 주원장이 죽고 아들끼리 싸운 끝에 [[영락제|연왕]]이 이겨서 [[금나라]]와 원나라의 수도였던 [[베이징]]으로 옮겨간 것. [[중국]]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의 [[방언]]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지금도 강남 지역의 [[광동어]]는 북경어에 기반을 둔 [[표준중국어]]와 같이 대화를 붙여 보면 거의 [[외국어]] 수준으로 소통이 안된다. 예컨대 하나 일(ㄧ, 1)의 발음은 표준중국어로는 이(yī)지만 광동어론 얏(yat1)이다.] 이색의 중국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주원장은 이색이 구사하는 중국어를 두고 "그대의 중국말 하는 것은 꼭 [[나하추]](納哈出)와 같다"하고 웃었고 이색은 돌아와서 "나는 [[홍무제|황제]]가 반드시 이 일을 물어볼 줄 알고 이것저것 준비해 갔는데 황제는 정작 내가 생각지도 않은 것만 물어보더라"고 하면서 주원장을 두고 "마음에 줏대가 없다[心無所主]"고 깠다.[* 당시 이색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막기 위해 고려에 대한 명나라의 ~~[[신탁통치]]~~ 감국(監國)을 논의하고자 하였다. 국가 중대사를 논하려 했는데 말장난이나 하고 왔으니 이색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만했던 것.] 이 사건은 홍무정운의 발행을 비롯해 중국의 표준어를 통일시키는 과정에서 [[문자의 옥]] 등의 반발이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다만 서로 발음이 너무 달라서 소통이 안될 정도였다면 이색 또한 주원장의 질문을 못 알아듣고 통역을 통했어야 정상인데 기록대로라면 이색은 주원장의 질문을 통역없이 알아듣고 대답을 했다. 주원장도 말을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음에도 일부러 원나라 억양이 강한 걸 [[조롱]]하기 위해 못 알아듣겠다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진짜 중요한 밀담을 나눴지만 그걸 당연히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무엇보다도 당시 사신단 일원 중에 이방원이 있었다.] 저렇게 얼버무렸을 가능성도 있다. * [[태종(당)|당태종]]이 [[안시성 전투]]에서 눈에 화살 맞았다는 이야기를 퍼뜨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유림관에서 지은 정관음(貞觀音)이라는 시에서 "주머니 속의 물건인 줄 알았으나 어찌 검은 꽃이 흰 깃에 질 줄 알았으랴(謂是囊中一物耳 那知玄花落白羽)"라고 쓴 것이 그것.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도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s-3|목은 선생이 당대에 좀 배운 사람인데 근거가 있어서 한 말이겠지]]"라고 하면서 《[[동사강목]]》에 실었지만... * [[세조(조선)|세조]]와 함께 [[계유정난]]에 참가해 정난공신에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등을 숙청하고 세조를 즉위시켜 좌익공신까지 오른 [[이계전]]과 [[이계린]]이 이색의 손자다. 그로 인해 이색의 후손들은 훈구파의 한 축이 된 것에 비해 이색의 학풍을 이은 제자들은 사림파의 한 축이 되었다.[* 훈구와 사림은 현대인들 생각처럼 딱 나뉘는 [[정당]] 같은게 아니다. 고려 말의 권문세족과 신진 사대부도 마찬가지.] 하지만 [[사육신]] 중 1명인 [[이개]]는 이색의 증손자로 같은 가문에서도 다른 길을 걸었다. 그의 6대손이 바로 [[이지함]]이다. 그리고 이지함의 조카인 [[선조(조선)|선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이산해]]가 이색의 7대손이다. * 이색의 또 다른 손자인 이맹균 ^^(1371년 ~ 1440년)^^은 [[세종대왕]] 치하에서 세자인 이향(훗날의 [[문종(조선)|문종]])까지 가르치던 스승이었으며 좌찬성까지 올랐으나 여종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이를 안 부인 이씨가 그 여종을 굶기고 때려죽이게 했다. 그러자 이맹균은 여종이 잘못하여 아내가 때려죽였다고 하며 시체마저도 길가에 내다버렸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하여 바로 세종대왕이 아무리 종이라고 해도 이런 짓은 심하다고 비난하며 그를 파직시키고 이씨와 이맹균을 귀양보냈다. 그나마 황해도 우봉헌으로 귀양간 이맹균은 몇달도 안돼 병으로 다 죽어갔고 세종은 어차피 이젠 죽을 거 귀양을 풀어줬으나 이맹균은 한양으로 오던 도중 개성에서 숨졌다. 이씨는 남편 장례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귀양을 풀어줬지만 이후 3년이나 귀양살이를 해야했다. * 훗날 19세기 초엽 먼 후손[* 이름이 유실되었는데, 한산 이씨로, 이색의 먼 후손이라는 것만 기록되어 있다.] 중 한 명이 길주로 유배를 가서 1807년 9월부터 11월까지 총 약 2개월간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북정일기]]를 작성하는데, 이 서적은 19세기 초엽 [[조선시대]]의 사회상과 유배인의 생활을 담아낸 기록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영종도]]의 옛 이름인 '자연도'를 제목으로 한 시를 썼다. [[영종 씨사이드파크]] 캠핑장 부근 방죽에 이 시가 설치되어 있으나 관리 부실로 글자가 떨어져 나간 게 몇 개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은 영종도에 이색을 유배보내어 몰래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고 모의했었던 적이 있다. * 정도전은 당시 동문이었던 [[이숭인]] 등을 장형을 집행할 때 황거정, 손흥종[* 이 둘은 정도전 전용 킬러로 활약했으며, 특히 손흥종은 왕씨 학살 등 개국 과정에서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태종 시기에 서인으로 강등되고 가산이 적몰되어 알거지가 되었다. 대간에서는 몇 번이나 이들을 처형할 것을 주청했으나 집행되지 않았다.] 등의 수하들을 시켜 몽둥이를 엉덩이가 아닌 등골에 내리쳐 집행하는 방법으로 살해했는데, 이색의 아들인 이종학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살해하려 했다. 그런데 형 집행 현장에서 이색의 문하생인 김여지가 판관이 되어 이를 막았다.[* 이종학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여러 칭찬을 받고 사법살인을 당한 점이 참작되어 기려지는 인물이지만, 유학의 종주이면서 정치에 참여하던 이색의 아들로 다년간 과거시험을 주관해 문생들을 등용했기에 이에 대한 비난이 일었다고 한다. 결국 죽기는 했지만, 이 때는 그것이 자기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 당시 실제 현장에서 사법살인을 막은 문생 김여지는 후일 재수사 당시 이종학의 암살에 대해 증언하면서 이성계의 뜻과 배치되는 살인행위임을 주장했다.] 결국 아예 유배처에 갇혀 있던 이종학에게 암살자 손흥종을 보내 한밤중에 몰래 목졸라 죽였으나, 이것이 후일 조정에서 재수사되어 신원되었다. 이색의 영향력이 강한 것도 있고 당시 조정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고 밝히려는 신원 작업을 위해 수하들에게 죄를 씌우려는 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관련자들의 탄핵 운동이 활발하게 일었고, 심지어 [[남은]]의 형인 [[남재]]도 암살 음모를 알면서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탄핵되었을 정도. * [[권근]], [[하륜]] 등이 이색의 비문과 행장에 기술하면서 "당시(공양왕 시기)의 권력자(用事者)가 공을 꺼려서 장단으로 귀양보냈다"와 같은 기술을 했다가 이것이 당시의 실권자이던 태조 이성계를 가리킨 것이 아니냐는 대역죄, 필화 사건으로 비화된 적이 있다. 태종은 권력자란 조준과 정도전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는 입장을 밝혔다. 당황한 하륜이 이에 반박하는 사죄문을 길게 써서 몇 장이나 올리니까 귀찮다고 무시하는가 하면, 대간에서 "[[공양왕]] 시기에는 조준이 권력을 잡은 적도 없는데 무슨 소리냐, 이성계를 말한 것이 맞다" "전하께서도 이색의 행장을 보고 분노해 찢어버리고 검열하지 않으셨느냐"등의 근거를 들어 논리적으로 반박하자 할 말이 없어져서 '''"어허, 내가 병이 발작해 들어주기가 어려우니 물러가라"''' 같은 어이없는 소리까지 하며 이를 무시했다. * [[유교]]의 종주면서도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이어서 이 점이 두고두고 후세에 비난을 받게 되었다. 거꾸로 [[불자#s-1|불자]]였던 이성계는 불교를 믿는 것이 유학자들인 신하들에게 공격받을 때마다 어색하게 '''"유학의 종주인 이색도 불교를 믿었는데 그럼 니가 이색보다 잘났냐?"''' 같은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s-3.15|꼰대식 반박]]을 시전했다. == 대중매체 == 역성혁명은 물론 정도전의 급진적인 개혁에도 반대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 탓에 [[여말선초]]를 다룬 작품들 중 조선 건국 주축들을 주인공으로 다룬 작품들에서는 뛰어난 지식인이면서도 주인공 측과 대립하는 [[반동인물]]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다만 유종으로서 남긴 명성은 워낙 뛰어난지라 이색의 업적과 신념, 그리고 비극적인 인생사를 입체적으로 그리는 작품들도 많은 편. * 1983년 [[KBS]] 드라마 <[[개국(드라마)|개국]]>에서는 배우 [[전무송]]이 연기했다. *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추동궁 마마에서는 배우 [[이대로]]가 연기했다. 이색은 이성계의 앞에서도 '송헌'이라고 부르며 칭신하지 않았는데 소식을 전해듣고 가장 분노한 것은 정안군 이방원.[* 당시에 있었던 중신들을 불러 호통치기까지 했다.] 이방원은 궁궐과 자신과의 연락을 맡고 있던 [[우왕]]의 후궁인 [[칠점선]]에게 명하여 이성계가 이색에게 하사하는 술에 독극물을 넣을 것을 지시하고 여주 강 배 위에서 술을 마신 이색은 피를 토하고 쓰러지며 근처 신륵사 방 안으로 옮겨지지만 의원의 진맥도 받지 못하고 유언도 못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이방원의 악업이 두드러지는데 오죽하면 고려 왕족들을 모두 물에 빠뜨려 수장시킨 것도 이방원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묘사된다. 이방원의 사적인 부하 [[이숙번]], [[송거신]][* 역사적으로 이방원의 부인 여흥 민씨와 친척 간/여흥 민씨의 어머니가 여산 송씨.], [[목인해]][* 2차 왕자의 난에서 눈에 화살을 맞아 실명하는 것으로 묘사.], [[마천목]] 등이 관원인 [[조영규]]와 합세하여 배 안에 구멍을 뚫는다.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남일우]]가 연기했다. 조선 건국 이전에는 이성계에게 정치적 경륜과 조언을 해줬던 기억이 있던 만큼 대업의 의의를 편을 들이고자 정몽주보다도 먼저 이성계가 설득하러 간 인물로 나온다. 그러나 당시 정몽주와 더불어 이성계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그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말선초의 기록이 가장 세세한 드라마인 만큼 이색이 겪는 고난도 다른 드라마들과 다르게 세밀히 묘사된다.[* 작중에서 유배를 갔다와서 자신의 가족들과 제자들이 죽고 자신의 몸 또한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모습이 생생히 묘사된다.] 그럼에도 고려에 충성하며[* 같이 고문을 받던 이숭인 등의 인물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고통에 명나라에서 전해진 유언비어를 확실하게 퍼뜨리자라고 말하자 명나라를 빌어 이성계를 처단하면, 고려 역시 더한 고통에 휩쓸리며 그런 것을 원하지 않기에 그 고통을 견디겠다고 말한다.] 조선 건국 이후 [[이성계(용의 눈물)|이성계]]를 가리켜 '송헌'(이성계의 호)이라 부르며 조롱하지만 관대한 이성계는 절개를 높이사 처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전답을 내린다. 산천을 유람하던 중 이성계가 보낸 어주상을 받게 되는데 제자들이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며 말리는걸 무시하고 술을 마시며 먼저 간 [[이숭인]]과 [[정몽주]]를 회상하다 갑자기 쓰러져 사망한다. 소식을 들은 이성계가 분노하여 도승지에게 "소줏간을 맡고 있는 자를 불러오라" 이르지만 그가 "소줏간의 어주를 몰래 훔쳐마신 게 과하여 길가에서 얼어죽었다"고 하니 책상을 내리치며 물러가게 하였다. [[정도전(용의 눈물)|정도전]]이 "사건을 더이상 캐지 말고 덮자"는걸 보면 정도전이 은밀히 손을 쓴 듯하다. 본래 이색의 죽음은 [[서울특별시|한양]] 천도 이후의 시점이었는데 한양 천도 이전의 시점으로 잘못 묘사하였다. * 2005년 [[MBC]] 드라마 <[[신돈(드라마)|신돈]]>에서는 배우 [[전인택]]이 연기했다. 유림이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세워진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신돈]]이 성균관을 재건하는 등의 유림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자 개혁에 동참하지만 신돈과 [[공민왕]]이 대립하기 시작하니 신돈과 거리를 두며 방관하기만 한다. * 2012년 [[SBS]] 드라마 <[[신의(드라마)|신의]]>에서는 배우 김형종이 연기했다. * 2013년 [[SBS]] 드라마 <[[대풍수]]>에서는 배우 [[최용민(배우)|최용민]]이 연기했다.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는 배우 [[박지일]]이 연기했다. [[이색(정도전)]] 문서 참조.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김종수]]가 연기했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드라마)|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남명렬]]이 연기했다. [[이성계(태종 이방원)|이성계]]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우왕에 대한 처분을 의논하다가 [[이방원(태종 이방원)|이방원]]이 우왕을 제거할 걸 건의하자 [[정몽주(태종 이방원)|정몽주]]는 이를 반대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나 이색은 정몽주를 찾아가 이방원의 의견이 옳다고 이야기하며 이방원을 두둔한다. 이후 [[공양왕]]이 즉위하자 한산 부원군에 임명되어 나타나는데 공양왕 즉위의 1등 공신인 이성계가 하대받았다는 것에 발끈한 이성계의 측근들이 왕에게 불만을 표출하자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며 일갈한다. 하지만 이후 이방원이 공양왕을 은근히 압박하자 겁에 질린 공양왕이 파직과 유배를 명하며 유배지로 끌려가게 된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개국 편과 태조, 정종실록에서 등장한다. 개국 편 2장 첫 파트에서 작가가 이색을 소개하는걸로 첫 등장한다. 위화도 회군 이후 [[조민수(고려)|조민수]]와 함께 후계 자리를 정하는데 이때 이색이 순리대로 해야하는거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더니 “[[우왕|선왕]]의 [[창왕|장자]]를 세우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조민수도 “아! 공께서도 그리 생각하십니까?”라고 말하면서 이 둘은 대비마마의 힘을 빌려서 창왕을 옹립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명나라에 창왕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창왕을 모시고 명나라로 가려했는데 이때 대비마마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인 [[정안군]]과 명나라에 간다. 이후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더니 1390년 (공양왕 1년)에 [[윤이 이초의 옥사]]가 터지면서 [[이숭인]]과 함께 유배지에 있었다가 국문을 받고 옥에 갇힌다. 그러나 공양왕이 이성계 일당을 설득해서 이들을 석방한다. 태조, 정종실록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하는데 이색은 태조의 배려로 유배지에서 풀려나는데 이때 제자들을 떠올리면서 이방원에게 죽은 [[정몽주]], 곤장맞고 죽은 [[이숭인]]과 자신의 장남인 이종학을 떠올리면서 슬퍼한다. 또 태조가 이색을 불러 관직을 내려주려하자 “망국의 대부는 보존되기를 바라지 않는 법 입니다.”라고 말하고[* 죽어도 협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다시 낙향하는데 1396년 (태조 5년) 결국 신륵사로 가던도중 객사하면서 등장종료. == 둘러보기 == [include(틀:고려사)]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색, version=132, paragraph=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