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제국의 매국노)] || '''{{{#ffde09 역임한 지위}}}'''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군부대신)]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농상공부대신)]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법부대신)]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 [include(틀:조선귀족)] ---- [include(틀:조선총독부 중추원)]}}} || ||<-2> '''{{{#ffde09 [[대한제국 중추원|{{{#ffde09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br]{{{+1 이근택}}}[br]李根澤 | Lee Geun-taek}}}'''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李根澤.jpg|width=100%]][br][*출처 [[https://books.google.co.kr/books/about/朝鮮貴族列傳.html?id=FDujnQEACAAJ&redir_esc=y|《조선귀족열전》]](朝鮮貴族列傳) ]}}} || || '''이름''' ||<(> 이근택 (李根澤) || || '''초명''' ||<(> 근용 (根湧) || ||<|2> '''출생''' ||<(> [[1865년]] (고종 2년) [[9월 30일]][br]([[음력]] [[8월 11일]]) || ||<(> [[충청북도]] [[충주시|충주]] || || '''사망''' ||<(> [[1919년]] [[12월 17일]] (향년 54세) || || '''직업''' ||<(> 군인, 정치가 || || '''종교''' ||<(> [[유교]] {{{-2 ([[성리학]])}}} || || '''본관''' ||<(> [[전주 이씨]] 경명군파[* 13대손 근(根)◯ 항렬. 시조로부터는 42대손이다.] || || '''작위''' ||<(> [[조선귀족]] 자작 || || '''주요 경력''' ||<(> 병조참판[br]좌부승지[br]군부대신[br][[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br]조선귀족 자작 || || '''가족''' ||<(> 아버지 이민승(李敏承)[br]형 [[이근호(1860)|이근호]][br]동생 [[이근상]][br]동생 이근홍(李根洪)[br]동생 이근목(李根沐)[br]이름 모르는 아내[br]아들 이창훈(李昌薰) || [목차]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ffe67b7cdba85e9b23e1e8a771a.jpg|width=100%]]}}} || [clearfix] == 개요 == [[조선]]과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 [[을사오적]] 출신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이다. == 생애 == 1865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에서 [[성종(조선)|성종]]의 9남 [[경명군]]의 12대손인 [[어영청]]파총(御營廳把摠) 이민승(李敏承)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이근용(李根湧)'이며 1901년을 전후하여 '이근택(李根澤)'으로 [[개명]]하였다. 무신 집안[* 고조부 [[이종혁]](李宗赫)과 증조부 [[이형재]](李亨在)는 수군절도사, 조부 [[이종준]](李鍾俊)은 훈련원정, 아버지 [[이민승]]은 병마절도사를 지냈다.[[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UV_6JOc_9999_004668&curSetPos=3&curSPos=1&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이었지만 출사의 계기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 민씨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명성황후 민씨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입문하였고 병조참판 등을 역임한 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당시 친위 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꾀하던 도중 발각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98년 [[서울특별시|한성]]판윤, 의정부 찬정 등을 거쳐 1905년 법부대신(지금의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 장관)과 군부대신(지금의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였는데 [[이완용]]이 주도한 [[을사조약]] 체결에서 적극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힘으로서 을사오적이 되었다. 때문에 조선 민중들과 의사의 표적이 되어서 습격을 받거나 위협을 받았지만 살아남았고 이후로는 [[일본군]]을 호위 대동하여 출퇴근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훈1등 [[자작(작위)|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1919년 [[사망]]했다. == 기타 == *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한규설]][* 한규설은 [[을사조약]]을 반대한 [[애국자]]이다.]의 딸이 이근택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서 [[사돈]] 관계였다고 한다. 그래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며 자랑스러워하는 이근택에게 한규설의 딸을 따라온 교전비(여종)가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와 꾸짖기를 아래와 같이 말하고 옛 주인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로 그의 [[고기]]베던 머슴과 침모가 집을 나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네가 대신까지 되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죽지도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 돼지보다도 못하다. 내 비록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느냐? 내가 힘이 약해서 너를 반 토막으로 참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 의외의 사실이지만 원래 이근택은 친러파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이용익]]과 함께 [[고종(대한제국)|고종]]의 군비 증강 [[정책]]을 이끌던 인물이었지만 이근택은 [[해군]] 양성을 주장했기에 [[육군]] 양성을 주장한 이용익과는 서로 [[암살]]자까지 보낼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 이근택은 [[일본]]의 군사 정보를 캐내기 위해 [[대한제국]] 정보대를 창설한 인물이기도 한데 정보대를 통해 일본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알게 되었고 정보대가 보내는 정보들이 너무 비관적이어서 점점 [[친일]]로 기울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괴물]]과 싸우려다 심연에 삼켜져 버린 사람.[[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717145895|관련 링크]] * 이근택의 아들 이창훈(1890~1947)는 아버지의 사후 작위를 습작받았고 그 아들인 이원구(1912~?)는 1949년 [[반민특위]] 조사 때 기준으로 [[충청남도]] [[공주시|공주]] [[공주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고 한다.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으나 아버지가 광복 후에 사망하여 습작을 받지 않아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리고 이원구의 아들, 즉 이근택의 증손자인 이상우는 1995~1998년 [[공주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다가 1998년 사망했고 그 동생은 공주대 물리학과 명예교수를 역임했다고 한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87|#]] == 둘러보기 == [include(틀:온건개화파)] [include(틀:수구파)] [[분류:대한제국 중추원 의장]][[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충주시 출신 인물]][[분류:을사오적]][[분류:1865년 출생]][[분류:1919년 사망]][[분류:조선귀족 자작]][[분류:전주 이씨 경명군파]][[분류:조선의 무관]][[분류:온건개화파]][[분류:수구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