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경선}}}'''[br]'''李景仙'''}}}}}}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경선(1914)-1936년.png|width=100%]]}}} || ||<-2> 1936년 1월 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창씨명''' ||[[노무라]] 케이센(乃村景仙) || || '''이명''' ||이연순(李蓮順) || || '''본관''' ||[[고부 이씨]][* [[http://aks.ai/GC04600913|#]]. 벽동공파(碧潼公派) 33세 경(景) 항렬.] || ||<|2> '''출생''' ||[[1914년]][* [[http://db.history.go.kr/id/ia_3537_2750|1934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15년생으로 기재돼 있다.] [[5월 14일]] ||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동|안양리]][br](現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http://aks.ai/GC04600913|#]]] || || '''원적''' ||[[전라남도]] [[제주시|제주군]] [[대정읍|대정면]] [[가파도|가파리]] 342번지[br](現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 ||<|2> '''사망''' ||몰년 미상 || ||[[북한]] || || '''학력''' ||대정공립보통학교 {{{-2 ([[졸업]])}}}[br][[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2 ([[졸업]])}}}[br][[이화여자전문학교]] {{{-2 (제적)}}}[br]나가노의학전문학교 {{{-2 (제적)}}}[br]고베약학전문학교 {{{-2 ([[졸업]])}}}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관술]]의 제자로 반제동맹 독서회의 핵심 활동가였으며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했다. 광복 후 [[제주 4.3 사건]]에 휘말렸다. 202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으면서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다. == 생애 == 1914년 5월 14일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現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에서 [[가파도]] 출신의 항일인사였던 아버지 [[http://aks.ai/GC04601998|이도일]](李道一, 1897. 5. 20 ~ 1971. 5. 29)[* 고부이씨 벽동공파 종친회 부회장을 역임했다.]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응주(金應珠, 1896. 2. 16 ~ 1972. 1. 7)[* 김명환(金明煥)의 딸이다.]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도일이 경기도 시흥군에서 수산물 도매상을 하던 때에 태어났으나 어릴 때 부친의 고향 [[가파도]]로 가 성장해서 보통 이경선도 제주 출신 독립운동가로 여겨진다. 그녀의 장래희망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32졸업앨범동덕여고.jpg|width=100%]]}}} || ||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1932년 졸업앨범 속 학교 전경''' || 대정공립보통학교를 거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평소 교사 [[이관술]]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는데, 특히 3학년 때이던 1931년 10월에는 이관술의 지도하에 교내에 항일 독서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토론했다. 이경선은 이관술이 만든 경성반제동맹의 핵심 활동가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반제동맹활동개요.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반제동맹조직책동.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반제송국.jpg|width=100%]]}}}|| ||<-3>'''반제동맹을 보도한 기사 중 일부. 반제동맹은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 그 뒤 [[이재유]]로부터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및 다른 여학교 학생 중에 동지를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고, 1932년 12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제주도 친구인 김주원(金周援)의 집에서 같은 학교 방순랑(方奉嫏)·신진순(申進順)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고 활동했다. 그러나 1933년 1월 [[서울종로경찰서|경성부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다가 [[훈방]]되었고, 그해 2월 독서회 활동 혐의로 다시 [[서울서대문경찰서|경성부 서대문경찰서]] 고등계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2월 21일 재차 훈방되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경선(1914)-1934년.png|width=100%]]}}} || || '''1934년 5월 25일,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 1933년 3월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한 학기 만에 퇴학당했다. 그해 6월부터 이재유가 이끄는 [[경성트로이카]]에 가담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등 여자중등학교 책임자에 선임된 뒤 독서회 활동을 지도하여 동맹휴학을 이끌어 내었다. 이후 경성트로이카 [[김삼룡]]의 지도하에 경기도 시흥군 소재 조선직물주식회사(朝鮮織物株式會社) 인견공장에 여공으로 위장 취업하여 여공들을 동지로 포섭해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시도했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힘썼다. 그러나 1934년 2월 21일 경기도경찰부에 생애 세 번째로 체포되었고 1935년 12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100일 통산), [[집행유예]] 3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80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2162&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선고받아]] 곧 석방되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시]]의 나가노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1941년 12월 9일 [[효고현]] 무코군(武庫郡) 모토야마촌(本山村) 나카노(中野)[* 現 [[고베시]] [[히가시나다구]] 모토야마초(本山町) 나카노(中野).]에서 네 번째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당했다. 이후 석방되었으나 퇴학 처분을 받았고, 1942년 10월 고베약학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1942년 12월 24일[*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806&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2163&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수형인명부]]에는 1942년 10월 23일로 기재돼 있다.] 고베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806&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2163&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선고받아]] 복역하였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944년 2월 29일 출옥했고, 고베약학전문학교에 복학해 졸업한 뒤 [[8.15 광복]]을 맞아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오영조(吳榮造)[* 고부이씨대동보 권4 867쪽에는 오철영(吳鐵榮)으로 등재돼 있다.]와 결혼하여 제주도에 살았다. 1946년 12월에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산하 선전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947년 부친 이도일이 초대 대정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이경선도 대정중학교 교사로서 [[물리]]와 [[화학]]을 담당했다. 이때 [[김달삼]]도 대정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김달삼이 학생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자, 이경선은 학생들이 피해를 볼까봐 사회주의를 선동하지 말라며 김달삼을 야단치고 부친에게 말해 해고시켰다. 이후 김달삼은 4.3 사건의 주동자가 되고 이경선은 [[제주 4.3 사건]]에 휘말려 연행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 이후 [[일본]]으로 피신해 그곳에서 [[약국]]을 경영했으며, [[재일교포 북송]] 때 [[북한]]으로 간 뒤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202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여담 == * 특이하게도 유족이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지 않았는데도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 * 이경선의 남동생 이경암(李景岩, 1945. 5. 12 ~ )은 "아버지는 [[대정읍|대정]] 지역에서 주정공장을 운영해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지만 누나는 기득권을 버리고 항일운동에 전념했다"며 "4·3의 회오리 속에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간 누나는 결국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이북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밝혔다.[[https://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84393|#]]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약사]][[분류:물리교사]][[분류:고부 이씨]][[분류:만안구 출신 인물]][[분류:1914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동덕여자고등학교 출신]][[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제주 4.3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