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인 前 야구선수, rd1=이경록(야구선수))] [include(틀:이순신)] ---- 李慶祿 [[1543년]]([[중종(조선)|중종]] 38) ~ [[1599년]]([[선조(조선)|선조]] 32)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 자는 백수(伯綏). 왕실 종친 출신으로 [[효령대군]]의 7세손이다.[* 다만 [[전의 이씨]] 시조 16세로도 나오는데, 청주부읍지에 판관을 지냈다는 기록이 양쪽 다 나오는 것으로 보아 동일 인물로 판단되나, 전의 이씨에서 나오는 이경록의 생몰년은 1541년~1612년으로 되어 있다.] 특이사항으로 한반도의 최북단과 최남단인 [[함경도]]와 [[제주도]]에서 관직을 지냈다. == 생애 == 이경록은 1543년 회덕 현감(懷德縣監:종6품)과 오위장(五衛將:종2품)을 지낸 이간(李幹)의 아들로 태어났다. 충의위(忠義衛)로 복무하다가 1576년(선조 9) 식년시 [[무과]]에 병과(丙科) 3위로 급제하여[[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576_000243|#]][* 당시 병과 4위가 다름아닌 [[이순신]]이었다.], 선전관, 호조 좌랑 등을 거쳐 1587년에는 경흥 부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여진족이 녹둔도를 공격해 백성 160여명이 끌려가자 당시 조산 만호였던 이순신과 함께 여진족 토벌에 나서 절반 이상의 백성들을 구출했으나 이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녹둔도 전투]] 참조. 당시 이경록의 상관인 북병사 [[이일]]이 책임을 면하기 위해 피해의 책임을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돌렸으나 조정에선 이순신의 변론을 인정해 두 사람에게 [[백의종군]]이란 처벌만 내렸다. 이후 다시 여진족이 침범했을 때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으면서도 이를 격퇴한 공을 인정받아서 1589년 김해 부사로 직책을 옮겼다. 이후 1592년 나주 목사를 거쳐 1593년에는 제주 목사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이경록은 [[제주도]][* 위에서 녹둔도에서 근무를 했던 것과 연결지어보면, 한반도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내려온 셈이다.]를 관리하며 본토에 식량과 가축 등 전쟁 물자를 지원하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제주도에서 보낸 소나 곡식을 분배한 기록이 있다.] 제주도의 병력을 선발해 본토에 증원할 뜻을 밝히기도 했으나 당시 조정에선 제주도의 방위 또한 중요하다며 거부하였다. 제주도의 성곽들을 개축하는 일을 지휘하던 도중 병에 걸려 1599년 1월 사망했다. 훗날 [[인조반정]] 공신이 되는 아들인 [[이서(1581)|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의 봉군에 의해 완령부원군(完寧府院君)으로 추봉된다. [[분류:조선의 무관]][[분류:1543년 출생]][[분류:1599년 사망]][[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전주 이씨 효령대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