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겸호}}}'''[br]'''李謙浩'''}}}}}}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겸호(1895).jpg|width=100%]]}}} || || '''이명''' ||이석(李石) || || '''자 / 호''' ||익경(益卿) / 해강(海岡) || || '''본관''' ||[[재령 이씨]][* 영해파(寧海派)-호군공파(護軍公派) 24세 호(浩) 항렬.] || ||<|2> '''출생''' ||[[1895년]] [[8월 12일]] || ||[[안동시|안동부]] [[영덕군|영해군]] 오서면 오촌동[br](現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239번지[* 이 지번에는 현재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2_0&ccbaCpno=2443700960000|면운재고택 및 별묘]](眠雲齋古宅 및 別廟)가 위치해 있다. 이겸호는 면운재(眠雲齋) 이주원(李周遠, 초명 이정배李正培, 1714 ~ 1796. 12. 17)의 7대 주손(胄孫)이다. 현재 9대 주손이자 이겸호의 장손자 이인희(李寅熙, 1953 ~ )가 이 고택을 소유 및 관리 중에 있다.]) || || '''사망''' ||[[1942년]] [[8월 29일]][* 재령이씨영해파보 권3 369쪽에는 1972년 7월 16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 (향년 47세) || || '''묘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895년 8월 12일 안동부 영해군 오서면 오촌동(現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239번지)에서 아버지 이규발(李逵發, 1874 ~ 1945. 3. 7)과 어머니 [[의성 김씨]](1872 ~ 1946. 5. 22)[* 김진헌(金鎭巘)의 딸이다.]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중화민국]] [[봉천성]]으로 건너가 [[이상룡]]·[[이시영]]·[[김동삼]] 등을 도와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9년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통화현(通化縣) 삼원보(三源堡)[*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 싼위앤푸조선족진(三源浦朝鮮族鎭).]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이듬해인 1920년 4월 졸업했으며, 졸업 직후 [[서로군정서]]에 가입해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조선 국내에 입국했다. 1920년 10월 신흥무관학교 동창생이자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5중대 제1소대원이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8|이덕숙]](李德淑)·신형섭(申亨燮)을 만나 이덕숙으로부터 대한통의부 경고문 4통과 권고문 3통을 비롯한 기타 대한통의부 관련 문서류를 보았고, 그로부터 대한통의부의 실상을 듣고 군자금 모집에 협조해줄 것을 권고받았다. 이후 이 문서들과 무기를 숨기고 이덕숙을 숨겨 주기도 했다. 그 뒤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됐으나 1921년 3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다이쇼 시대|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60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8766&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받고]]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1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2232&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출옥했다]]. 1923년 이덕숙과 신형섭을 다시 만나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함께 전개했고, 1924년 4월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이덕숙, 권동호(權東鎬)를 만나 영덕군 [[영해면]] 방면에서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그해 6월 창수면 오촌동에서 일본 제국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되자 총격을 가하고 도피했고, 이후 각지를 전전하며 은신하다가 1924년 9월 18일 [[경기도]]에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4년 8월 7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이른 바 [[협박죄|협박]]·[[다이쇼 시대|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총포화약류 취체령 시행규칙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263&evntId=0034989253&evntdowngbn=Y&indpnId=000002043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아]] 이에 공소하였으나,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952&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9921&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1924년 9월 19일]],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952&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9923&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1924년 12월 16일]],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95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9966&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1925년 3월 17일]] 세 차례에 걸쳐 대구복심법원에서 구류갱신이 이뤄졌고 1925년 3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위와 같은 혐의에 대해 미결 구류일수 중 18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712&evntId=0034984912&evntdowngbn=Y&indpnId=0000016396&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형기는 그대로 유지돼]]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다시 중화민국 봉천성으로 건너가 이상촌 건설을 위해 노력하다가 재차 체포돼 1년 7개월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3534|구금되기도 했다]]. 이후 1942년 8월 29일 별세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영덕군 출신 인물]][[분류:재령 이씨]][[분류:1895년 출생]][[분류:194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신흥무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