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주시의 관광)] [[파일:external/www.idaegu.com/01010101401.20140416.000044358.02.jpg]] ||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의 사적}}}]]''' '''{{{#f39100 제159호}}}''' || || {{{+1 {{{#fff '''경주 이견대'''}}}}}} {{{-1 {{{#fff 慶州 利見臺}}}}}} {{{-1 {{{#fff }}}}}} || ||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 '''{{{#fff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구비전승지 || || '''{{{#fff 면적}}}''' || 4,197㎡ || || '''{{{#fff 지정연도}}}''' || 1967년 8월 1일 || || '''{{{#fff 제작시기}}}''' || [[통일신라]] [[신문왕]] || ||<-2> '''{{{#fff 위치}}}''' || [include(틀:지도, 장소=경주 이견대, 너비=360)]}}}}}}}}}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에 있는 [[문무대왕릉]]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은 [[정자]]. [[통일신라]]시대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대에 만들어졌으며, 1967년에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 역사 ==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을 동해바다에 장사지낸 뒤, [[왜구]]에게서 신라를 지키는 [[용]]이 되었다고 여긴 문무왕을 참배하기 위하여 [[문무대왕릉]]이 잘 보이는 바닷가 언덕 위에 이견대를 지었다. 신문왕이 용에게 아이템 [[만파식적]]을 받은 곳도 이견대이다. 지금 이견대에 존재하는 이견정(利見亭)은 당연히 신문왕 때 만든 그 건물은 아니고 1970년 발굴로 건물지를 확인한 후 [[안압지]] 등에서 확인한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해서 197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원래 역할이 [[전망대]]이니만큼 여기서 내려다보는 바닷가 풍경이 꽤 괜찮다. 다만 이견대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라 좀 더 위쪽[* 현재의 이견대에서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면 예전 대본초등학교(2010년 폐교되어 감포초등학교와 통합됨)가 있었던 경주치즈마을이 나오는데 그 뒷산으로 5분 정도 올라가면 400~500 m쯤 되는 넓은 공간에서 신라 시대의 기와 조각과 함께 축성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이었고, 현재 알려진 이견대는 조선 시대에 역원이 있던 자리일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7808|관련 기사]] 2020년 경주시는 문무대왕릉 주변을 정비하는 사업을 발표했는데 문무대왕릉-이견대-[[감은사지]] 간에 보행자 탐방로를 설치하고, 이견대에는 해양역사문화관을 만든다고 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smDnvPyWLzc|#]] == 외부 링크 == * [[https://ko.wikipedia.org/wiki/이견대|한국어 위키백과: 이견대]] * [[https://ko.wikipedia.org/wiki/경주_이견대|한국어 위키백과: 경주 이견대]]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1191&cid=46620&categoryId=46620|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견대]]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54785&cid=42840&categoryId=42846|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이견대]]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55015&cid=42840&categoryId=428466|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이견대]]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29601&cid=42856&categoryId=42856|대한민국 구석구석: 경주 이견대]]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4099&cid=40942&categoryId=33545|두산백과: 경주 이견대]] == 사적 제159호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3,01590000,37&pageNo=1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경주 이견대 (慶州 利見臺)]]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다. > >신문왕은 해변에 감은사라는 절을 짓고, 용이 된 아버지가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다. 그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고도 한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한 말인데,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 >발굴조사 때 건물이 있던 자리가 발견됨으로써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오늘날 새롭게 다시 지었다. > >※(이견대 → 경주 이견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분류:통일신라]][[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경주시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