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663년 출생]][[분류:1722년 사망]][[분류:전주 이씨 밀성군파]][[분류:조선의 문관]][[분류:좌의정]][[분류:우의정]][[분류:노론]][[분류:참수된 인물]] [include(틀:역대 조선 정승(인조-경종))] || '''{{{#f0ad73 이건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4> [[노론|{{{#000,#fff '''노론 4대신'''}}}]] || || [[김창집]] || '''이건명''' || [[이이명]] || [[조태채]] || ---- [include(틀:노론)]}}} || ||<-2> '''[[정승|{{{#f0ad73 조선 정승}}}]][br]충민공(忠愍公)[br]{{{+1 이건명}}}[br]李建命'''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건명(초상화).png|width=100%]]}}} || || '''출생''' ||[[1663년]] [[11월 12일]][br](음력 [[현종(조선)|현종]] 4년 10월 13일)|| ||<|3> '''사망''' ||[[1722년]] [[9월 23일]] (향년 58세)[br](음력 [[경종(조선)|경종]] 2년 8월 13일)|| ||[[전라도]] 흥양현 [[나로도]][br](現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참수형]]|| || '''[[시호|{{{#f0ad73 시호}}}]]''' ||충민(忠愍)|| || '''[[본관|{{{#f0ad73 본관}}}]]''' ||[[전주 이씨]]|| || '''[[자(이름)|{{{#f0ad73 자}}}]]''' ||중강(仲剛)|| || '''[[아호|{{{#f0ad73 호}}}]]''' ||한포재(寒圃齋)|| || '''[[붕당|{{{#f0ad73 붕당}}}]]''' ||[[노론]]|| || '''저서''' ||「한포재집」|| || '''가족''' ||{{{-3 외할아버지}}} [[원두표]][br]{{{-3 아버지}}} 이민서[br]{{{-3 사촌}}} [[이이명]]||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세종(조선)|세종]]의 서5남 [[밀성군]]의 8대손이다. == 생애 == 1684년에 과거에 급제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정유독대[* 이건명의 종형인 이이명이 숙종을 '''단독으로''' 독대한 사건] 이후 우의정이 되었으며 [[영조|연잉군]]의 보호를 부탁받았다. 이후 늙은 [[숙종(조선)|숙종]]이 죽고 [[경종(조선)|경종]]이 즉위했다. 이때 이건명은 총호사로 숙종의 장례식을 총괄했다. 경종의 치세때는 좌의정에 올라 노론의 영수가 되었는데 조태채 등과 연잉군을 세제로 올리자고 제안--이라고 쓰고 강요라고 읽는다--하면서 [[김일경]] 등의 소론 강경파에게 미움을 샀다. [[목호룡]]의 고변으로 위기에 놓이고 다행히 사형을 피했지만 전라도 흥양의 뱀섬에 유배를 가며 위리안치당하고 만다. 하지만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서 한 말이 문제가 됐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였던 [[강희제]]와 청나라의 여러 대신들이 경종의 연잉군 세제 인정 요구에 의아해하며 '너희들의 임금은 아직 젊으니 얼마든지 아들을 낳을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세제는 무슨 세제냐.'라고 태클을 걸자[* 사실 이게 당연한 반응이다. 강희제의 말대로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당시의 경종은 30대 초반이였고, 그의 왕비인 [[선의왕후 어씨]]는 아예 20세도 되지않은 매우 젊은 나이였다. 즉, 경종 부부가 합방을 하면 얼마든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상황이였던 것. 게다가 [[강희제]]는 60대의 나이에도 증손주뻘의 어린 자식들을 후궁에게서 계속 보던 황제였으니 더욱 의아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멀쩡히 아들 낳을 수 있는 국왕이 있음에도 그의 동생을 세제로 책봉하겠다고 하니,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황당함을 넘어 조선에서 [[왕자의 난]]이라도 벌어진 건 아닌가하는 우려를 할 법도 했다.], 이를 둘러댄답시고 '''"임금이 양기가 없어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한다."'''는 무엄한 망발을 내뱉었던 것. 이게 빌미가 되어 소론의 탄핵을 받았고 경종마저 격노하여 다른 노론 4대신들은 사약을 마셔 곱게 사사당한 것에 비해, 이건명은 [[참수|목이 잘려서]] 시신조차 온전히 보존 못하는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실 이건명의 발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대의 [[입헌군주제]]에서도 명예훼손죄 내지 모욕죄로 고소당해도 할말이 없는 수준의 망발이다. 하물며 국왕이 신적 존재로 군림하는 [[전제군주제]]의 왕을 이런 식으로 능멸했으니 하단의 업적과 별개로, 목이 잘려도 할말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게 확실하며 오히려 목은 물론 [[거열형|사지 전체가 잘려나가지 않은 게]] 다행인 수준이다.] [[영조]]가 즉위했을 때 노론의 주청으로 복권되어 충민이라는 시호를 얻는다. == 여담 == 정승으로 있을 때부터 백성들의 생활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백성들을 위한 많은 정책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때 군포를 낮추자고 제안한 것이 이후에 영조가 [[균역법]]을 제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시를 잘 썼다고 한다. == 저서 == 저서에 「한포재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