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응우옌반랑'''(Nguyễn Văn Lang, ? ~ [[1513년]])은 [[베트남]] [[후 레 왕조]]의 장관이다. == 생애 == 청화(淸化) 송산(宋山) 사람으로, 《야사략편기(埜史略編紀)》에 의하면 상국공(爽國公) 응우옌반로(阮文𠐔)의 아들로, 장락황태후(長樂皇太后) 응우옌티항(阮氏恒)과 친척관계가 있다. 《[[대월사기전서]]》에는 응우옌반랑이 '병법에 정통하고, 천시(天時)에 밝았으며, 힘은 능히 호랑이를 잡았다.' 라고 묘사되어 있다. 처음에 의군공(義郡公)에 봉해졌다. [[1509년]], [[레 위목제]]가 외척 크엉쫑(姜種)을 총애하여 응우옌반랑은 파직당하고 고향으로 쫓겨나 돌아갔다. 응우옌반랑은 즉시 청화 3부(府)에서 거병하여 신부해구(神符海口)를 진수하였다. 당시 간수공(簡修公) [[레 양익제|레오아인]]은 위목제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수졸에게 뇌물을 주어 탈출하여 응우옌반랑에게 달아났다. 응우옌반랑은 그를 맹주(盟主)로 받들고, 격문을 뿌려 위목제의 폭정을 열거한 뒤 오래지 않아 병사를 거느리고 [[하노이|탕롱]]을 공격하였다. 위목제가 살해되자 레오아인이 양익제로 즉위했다. 응우옌반랑은 옹립의 공으로 의국공(義國公)에 진봉되었고, 그의 아들 [[응우옌호앙주]]는 안화후(安和侯)에 봉해졌다. [[1511년]], 양익제가 동쪽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는 것을 듣고 응우옌반랑을 도산(塗山)에 파견하여 이를 막도록 했다. 같은 해 쩐뚜언(陳珣)이 반란을 일으켜 탕롱을 공격하자 응우옌반랑은 양익제를 청화로 피신하게 하였다. 미혜후(美惠侯) [[찐주이산]]이 30여 명을 거느리고 적의 영채를 습격하여 쩐뚜언을 찔러 죽이니 형세가 역전되었다. 응우옌반랑은 대군을 이끌고 반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찐주이산은 이 공로로 양익제의 중용을 받았고, 응우옌반랑은 그를 시기하고 미워했다. [[1513년]], 응우옌반랑이 병으로 죽었다. 의훈왕(義勳王)에 추봉되었고, 왕의 예의를 사용하여 장사지내도록 했으며, 금으로 그의 상을 주조하였다. [[1516년]], 응우옌호앙주가 탕롱에서 축출당하고 청화로 달아났다. [[쩐쩐]]이 [[레 소종]]의 명의를 빌려 응우옌꽁도(阮公度), [[막당중]]을 파견해 그를 추격하게 했는데, 도중에 응우옌반랑의 묘를 지나게 되자 그것을 파헤치고 관을 열어 시체를 참수하였다. [[분류:1513년 사망]][[분류:베트남의 정치인]][[분류:베트남의 군인]][[분류:타인호아 성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