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203년 사망]][[분류:고구려의 국상]]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신암행어사 등장인물 , rd1=을파소(슈퍼스트링), other2=동명의 출판 브랜드의 출판사, rd2=북이십일)] ---- || '''{{{#white 을파소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개벽 선정 조선 10대 위인)] ---- [include(틀:삼국사기)] ---- [include(틀:역대 고구려 국상)] }}} || ---- || '''{{{#white 관등 }}}''' ||<(> '''우태(于台)''' || ||<:> '''{{{#white 직위 }}}''' ||<(> 중외대부(中畏大夫)[br]'''국상(國相)''' || ||<:> '''{{{#white 성씨}}}''' ||<(> 을(乙) || ||<:> '''{{{#white 이름}}}''' ||<(> 파소(巴素) || ||<:> '''{{{#white 생몰연도}}}''' ||<(> ? ~ 203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구려]] 초기의 [[명재상]]([[국상]]). [[고국천왕]]이 외척인 [[좌가려]]나 [[어비류]] 등의 세력을 제압한 후에 그동안 [[외척]]들의 횡포로 인해 어지러워졌던 내정을 살피기 위해 등용한 인물이었다. 이후 [[산상왕]] 대까지 고구려의 최고 [[관직]]인 국상 [[벼슬]]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다. [[진대법]]을 실행한 인물로도 유명한데, 정작 <[[삼국사기]]>를 비롯한 국내 [[역사서]]의 기록에는 그저 을파소가 선정을 베풀었다라고만 기록해놓았지 진대법을 직접 실행했다는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진대법이 시행된 시기가 을파소가 활약하던 때라 그가 시행한거 아닐까 추측하는 설들이 일반인들에겐 사실처럼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 생애 == >을파소는 [[고구려]] 사람이다. [[고국천왕]] 때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의 무리가 모두 외척으로서 권세를 휘둘러 불의한 짓거리를 하고 다니자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히 여겼다. 왕이 노하여 그들을 잡아 목베려 하자 좌가려 등은 모반을 일으켰다. 왕이 그 일당을 잡아 죽이기도 하고 일부는 내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명령하길, > >“근자에 벼슬이 총애로써 내려지고 덕없는 이가 자리에 오르니, 그 독이 백성에게로 흘러들어가고 우리 왕실은 흔들리게 되었다. 이것은 과인이 밝지 못한 탓이다. 그대들 사부에서는 각자 부족의 어질고 착한 이를 추천하라.” > >고 하였다. 그러자 사부에서 모두 동부의 안류를 추천해서 왕이 국정을 맡기기 위해 그를 불렀다. 안류가 왕에게 말하길, > >“하찮은 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큰 정치를 다룰 수 없습니다. 서압록곡 좌물촌의 을파소라는 자가 유리왕 때 대신 을소의 후손인데, 성격이 강직하고 굳세며, 슬기와 지혜가 연못처럼 깊습니다.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기에 혼자 밭을 갈며 살고 있는데,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리려 하신다면 바로 이 사람이 없이는 아니되옵니다.” > >라고 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로 초빙해 중외대부에 임명하고 우태의 작위를 주었다. 왕이 말하길, > >“내 감히 선왕의 자리를 이어받아 신민들의 위에 있게 되었으나 덕이 야박하고 재능이 짧아 다스림이 모자라오. 선생은 재주를 감추고 지혜를 숨겨 궁벽한 풀밭 늪지에 처한 지 오래이나, 지금 나를 저버리지 않고 마음을 돌이켜 이리 와 주니 이것은 나 혼자의 기쁨과 행복일 뿐 아니라 사직과 백성들의 복이올시다.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그대는 마음을 다해 주오.” > >파소는 비록 나라에 몸을 바치려 하였으나, 내려진 벼슬자리가 뜻을 이루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대답하길, > >“신은 둔하고 굼뜨어, 엄한 명령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대왕께서 현량한 자를 고관으로 삼아 대업을 이루시기를 바라옵니다.” > >라고 하였다. 왕이 그 뜻을 알고 이에 국상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 >이때 조정의 신하들과 왕실 인척들이 파소가 새로 들어와 옛 신하들을 차별한다고 말하며 그를 흠잡았다. 왕이 하교하길, > >“진실로 국상에게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귀천을 따지지 않고 일족을 멸하리라!” > >라고 하였다. 파소가 물러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길, >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이 선비로서 떳떳한 일이다. 금상께서 나를 두텁게 대우하시는데 어찌 다시 숨는 것을 생각하겠는가?” > >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정치를 밝히며 상벌을 신중히 하니, 인민들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했다. 왕이 안류를 불러 말하길, > >“만약 그대의 말이 없었다면 내 파소를 능히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루어진 모든 것은 다 그대의 공이다.” > >라고 하고 이에 대사자에 임명하였다. > >산상왕 7년 가을 8월에 을파소가 죽으니 백성들이 대단히 슬퍼하며 곡을 했다. >---- >《[[삼국사기]]》 권 45 을파소 열전[[http://ko.wikisource.org/wiki/%EC%82%BC%EA%B5%AD%EC%82%AC%EA%B8%B0/%EA%B6%8C45/%EC%9D%84%ED%8C%8C%EC%86%8C|##]] 을파소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명왕]] 시기의 대신인 을소의 [[후손]]으로 혈통으로 놓고 보자면 상당히 귀한 출신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에 [[가문]]이 몰락했는지 도성 밖으로 밀려나 서압록곡(西鴨淥谷)의 좌물촌(左勿村)에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고 있었다.[* 고구려의 도성 내에는 대개 [[고관대작]]들과 주요 [[귀족]]들이 살았지만 바로 성문 밖만 나가도 도성 밖으로 밀려난 귀족들이 [[평민]]처럼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사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좌물촌은 학계에서는 평북 [[의주군]]으로 비정하나, 북한 학계에서는 [[삭주군]]으로 비정하고 있다.] 후에 고국천왕이 외척인 좌가려, 어비류 등이 횡포를 부리고 [[모반]]을 꾀하자 이를 평정한 후에 모든 부(部)에 명을 내려 [[나라]]를 이끌어 갈만한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고구려 4부가 모두 함께 [[안류]]를 추천하였다. 하지만 안류는 을파소를 천거하며 강직하고 [[지혜]]가 있다고 평하였다. 191년 을파소는 이 말을 들은 고국천왕에 의해 초빙되어 중외대부(中畏大夫)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거기에다가 관작을 더해 우태(于台)가 되었다. 그러나 을파소는 "신은 감히 명을 받들 수 없으니 [[대왕]]께서는 현명한 사람을 뽑아 높은 벼슬을 주어 큰 뜻을 이루소서"라는 식으로 '더 높은 자리를 줘야 내 뜻대로 [[정치]]를 해 볼 만하다'는 입장을 에둘러 말했다. 이에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배짱과 기상에 감동먹었는지 대뜸 을파소를 국상으로 파격 [[채용]]하였다. 국상은 오늘날 [[국무총리]] 급의 직위로 관직 중에서도 최고위직이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돌에 박힌 돌이 빠지게 된 [[신하]]들은 고국천왕의 이러한 처사에 불만을 품고는 "웬 [[듣보잡]]을 재상 시킵니까?"이라며 을파소를 시기하고 미워하였다. 그러나 고국천왕은 "을파소 말을 안 들으면 내게 개기는 걸로 간주하고 [[지위]]와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일족을 모두 멸하겠다."고 못을 박으며 을파소에 대한 전폭적 지지와 신임을 나타냈다. 게다가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에게도 공이 있다고 하면서 대사자 벼슬을 주었다. 국상이 된 을파소는 자신의 뜻을 알아주고 높은 직위를 내려 준 고국천왕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선정을 펼쳤다. 이후 고국천왕이 죽은 후에도 국상을 지내다가 산상왕 7년(203) 8월에 삶을 마감했는데 이 때 온 나라의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전한다. 을파소가 죽은 후에 그의 뒤를 이어서 [[고우루]]가 국상이 되었다. == 평가 == 을파소가 죽었을 때 온 나라의 백성들이 슬피 통곡했다고 하니 이로 미루어보아 백성들로부터도 존경받았던 뛰어난 명재상이었다고 추측된다.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은 을파소 열전에서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중앙과 지방에 일이 없었다."라며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기록상으로 보면 고구려 역사상 최고의 명[[재상]]으로 불러도 될만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을파소의 유명한 [[업적]]으로 [[진대법]]이 거론되지만[* [[진대법]]은 [[곡식]]이 부족해지는 [[봄]]에 구휼미를 풀어 [[가을]]에 약간의 [[이자]]와 함께 갚게 하는 것으로, 이는 [[한국사]]에서 기록된 최초의 [[환곡제도]]에 해당한다. 이 법은 훗날 다른 [[왕조]]로 교체될 때까지도 계속 유지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고리대]]로 변질되어 버리는 부작용도 나타난다.], 사실 을파소가 직접 진대법을 시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을파소가 한창 내정을 이끌 때 진대법이 시행되어 진대법의 시행자가 을파소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이 널리 퍼져서 오늘날 마치 진대법을 직접 시행한 인물이 을파소인 것처럼 알려진 것이다. 물론 을파소가 당시에 국상을 지내며 국정을 보살피는 등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기에 진대법을 먼저 주창했느냐 여부를 떠나서, 진대법이 실행되는 과정에 일정 영향을 끼쳤을 확률은 높다. 을파소는 관직에 오르기 전 직접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았기 때문에 [[농민]]들의 문제점 역시 잘 알고 있어 이런 부분에 세심한 컨트롤이 가능했을 것이다. == 여담 == * 인명접미사 을파소의 '''-소(素)'''는 [[대소왕|대소]], [[추발소]], 을소, 우소 등과 같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람의 이름에 써온 말인데, 어떤 일의 전문가, 뛰어난 사람의 뜻을 가지고 있다. 흔히 사람의 이름 끝에 별다른 뜻 없이 '-이'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그냥 뛰어난 사람이란 뜻에서 이름을 '-소'라 붙이고는 '소이'라고 불렀다. 만약 우리말이 '소->소이->쇠'로 변한 게 맞다고 하면, 현대에는 순우리말로 '마당쇠', '돌쇠', '모르쇠'처럼 '''을파소이'''나 '''을파쇠'''로 불렸을 수도 있다. 뜻도 변해서 낮잡아 이르는 말일 가능성도 있다. * 참전계경(參佺戒經) 또는 팔리훈(八理訓)은 [[대종교]]의 계시 경전 중 하나이다. 한배검의 계시에 의해 만들어진 경전으로 [[환인]]이 [[환웅]]에게 전해준 세 경전 중 하나라고 대종교 측에서 믿고 있다. 정확한 작자는 미상이다. 단단 [[학회]] 측에서는 고구려의 국상 을파소의 저작이라 주장하고 있다. * [[한빛소프트]]와 [[스퀘어 에닉스]]의 합작 [[게임]]인 삼국지난전에 등장한다.[* 다만 [[국내]] 서버 한정이고 [[일본]] 서버는 [[히미코]]로 등장한다. 물론 대사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