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yuntaedong.png|width=300]]||||[[파일:yuntaedong2.png|width=200]]|| || 경성제대 강사 시절 || 만주국 간도성장 시절 || 尹泰東 [[1900년]] [[5월 13일]] ~ ? [목차] == 개요 == [[일제강점기]]의 [[친일파|친일]] 관료. 본관은 [[파평 윤씨|파평]](坡平). [[창씨개명|창씨명]]은 쿠라우치 젠조(倉內善藏). == 생애 == [[1900년]] [[5월 13일]] [[충청북도]] [[충주시|충주군]] 엄정면 미곡리(현 [[충주시]] 엄정면 미내리 미곡마을)에서 아버지 윤호(尹護)와 어머니 최완희 사이의 아들로 [[http://chungju.grandculture.net/chungju/toc/GC01901430|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일본]] [[도쿄대학|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서울대학교/학부/농업생명과학대학|수원고등농림학교]], [[보성전문학교]],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 등에 강사로 출강하는 한편, 1926년부터 1930년까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조수로 근무하였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강사로 임명되었고, [[1934년]] 7월에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수]]로 승진 임명되어 그해 11월까지 근무하였다. 조선인이 [[강좌제]]를 취하고 있던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임명된 것은 윤태동이 3번째이며, 전 기간을 통틀어 4명에 불과하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만주국]] 간도성(間島省) 교육청 학무과장, [[만주국]] 민생부 교육사 독학관, 대신관방 이사관 겸 교학관, 자료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협화회]]의 분회(수도계림분회)에서 참여(參與)로 활동하였으며 협화회 주최 행사에서 '일본국민과 협화정신'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43년 1월 간도성 차장을 거쳐 [[1945년]] 4월에 간도성 성장(省長)에 취임했는데 조선인이 성장(省長)에 발탁된 것은 [[이범익]] 이래 두번째이다. [[일본제국|일제]] 패망 후 평양으로 귀국했으나 1946년 1월 소련으로 연행되어 1949년까지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의 국제 포로수용소에 수용됐으며, 소련 당국에 의해 혹독한 정신 개조 과정을 거쳤으나, 소련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기타 == [[충주시]]가 윤태동의 생가를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하여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의 생가에 정부가 돈을 쓴다는 논란이 일었다.[[https://archive.is/VRcc0|#]]. 충주시 엄정면 미내리 133번지에 위치한 이 [[한옥]]은 [[사헌부]] 감찰을 지낸 윤양계(윤태동의 조부)가 1873년 지은 것으로 중요 민속자료 제135호로 지정돼 지금까지 3억원 이상의 관리 비용을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 담당자는 인물과는 무관하게 건축양식의 가치를 기준으로 지정됐을 뿐이라고 해명하였다. [[분류:충주시 출신 인물]][[분류:파평 윤씨]][[분류:1900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도쿄대학 출신]][[분류:경기고등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