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배우, rd1=윤종화(배우))] ||<-2> '''{{{+2 윤종화}}}[br]尹鍾華'''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윤종하.jpg|width=100%]]}}} || || '''[[이명#s-3|{{{#fff 이명}}}]]''' ||윤장섭(尹章燮)|| || '''[[창씨개명|{{{#fff 창씨명}}}]]''' ||[ruby(伊,ruby=い)][ruby(坂,ruby=さか)] [ruby(和,ruby=かず)][ruby(夫,ruby=お)](이사카 카즈오)|| ||<|2> '''출생''' ||1908년|| ||[[충청남도]] [[청양군]]|| || '''사망''' ||미상|| || '''학력''' ||[[공주고등학교|공주고등보통학교]] {{{-2 (졸업)}}}[br][[사가대학|사가고등학교]] {{{-2 (졸업)}}}[br][[규슈대학|규수제국대학]] 법문학부 {{{-2 (법학 / 학사)}}}|| || '''약력''' ||일본 [[고등문관시험]] 합격[br]창녕군수[br]김해군수[br]경기도청 경찰부 보안과장[br]종로경찰서장[br]황해도청 경찰부장||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에 [[창녕군]]의 [[군수]]와 [[서울종로경찰서|종로경찰서]]의 [[경찰서장]]을 역임한 친일 관료. 참고로 국회의원 [[윤상현(정치인)|윤상현]]의 작은할아버지다. == 생애 == 1908년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태어나 [[공주고등학교|공주고등보통학교]], 일본 [[사가대학|사가고등학교]][* [[구제고등학교]] 과정으로 현재의 대학교 교양과정에 해당됨.]를 거쳐 [[규슈대학|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경상남도청의 내무부에서 근무했다. 1937년 [[경상남도]] 창녕[[군수]]로 부임하여 재직하던 중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용물자 조달 공출, 국방헌금 모금 등의 전시 업무를 수행했다. 1939년 [[김해시|김해]]군수로 옮겨 중일전쟁과 관련한 군용물자 조달 공출, 국방헌금 모금, [[국채]]소화(國債消化)와 저축 장려 등의 업무를 수행하여 《[[지나사변]]공적조서》에 이름이 올랐다. 곧이어 함경남도청의 경찰부(1940년)와 경기도청의 경찰부(1942년)에서[* 지금의 [[지방경찰청]]([[행정자치부]] 직할의 광역경찰청)과 전혀 다른 직제로서 XX도청 직할의 XX부국이다. 왜냐하면 [[일본 제국]]의 경찰관들은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독일 제2제국]]의 [[경찰행정법]]을 본받아 내무성 직할의 경보국과 도쿄 시내의 [[경시청]]에서 근무하는 중앙경찰 및 [[도도부현]]의 민정관청에서 근무하는 지방경찰로 [[인사(직무)|인사]][[인사행정론|체계]]가 분리되어 있었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민정문관이 XX군수로 승진한 뒤에 XX경찰서장으로 부임하는 [[순환근무]]도 흔했다. 당연히 일본 본토의 현청 직제를 모방하여 [[조선총독부]]의 13개 도청에서는 [[도지사]]의 지휘를 받는 5개의 부국(경찰부, 내무부, 재무부, 농상부, 광공부)이 설치되어 있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의 [[관료제]]는 현대 시대의 1급~10급 공무원(국민의 충복)이 아니라 중세 시대의 정1품~종9품 문무관리(국왕의 충복)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 보안과장을 역임하고, 1943년 9월에 조선인 최초로 경기도의 [[경성부]]에 위치한 [[서울종로경찰서|종로경찰서]]의 [[경찰서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10월 1일자 《[[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 '''근로태세 정비할 터''' >[[종로]]는 [[한반도|반도]]의 중추지대이고 반도인 중상층 계급이 많은 곳으로 반도 민심의 동향을 결정하는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활동가로 필승체제가 서 있지 않으면 병참기지 반도의 사명을 다하기 어려울 줄 안다. 경찰관은 민중의 선두에 서서 계몽과 지도를 하여야 할 것을 확신한다. 나는 우선 결전하 긴급 문제인 방공태세와 근로체제 정비 또는 생산력 확충 등 필승의 온갖 시책의 추진력이 되어 책임을 다하여 나가려 한다. 황민화운동추진위원회[* 경성부 종로 관내 유력가인 [[윤치호]]·한상룡(韓相龍)·[[이광수(소설가)|이광수]]·한규복(韓圭復) 등 60여 명이 중심이 되어 황민화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의 고문과 국민총력 경성부연맹 이사로 선출되었고 1944년에 조선인 최초로 황해도청의 경찰부장으로 승진하여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조선인 [[경찰서장]]들 가운데 [[일본 경찰/계급|경시정]]으로 승진한 사람은 구연수(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경무관]]), ___(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경무관보), 최경진(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사무관), 윤종화(황해도청의 경찰부장) 뿐이고, 나머지는 보통경찰 계통을 아예 벗어나 XX[[군수]]로 수평이동해 XX도청의 XX부장으로 승진한 다음에 [[도지사]]와 도참여관 및 총독부 사무관과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참의로서 [[정년퇴직]]을 맞이했다.] 해방 후 1945년 9월 [[소련군]]에 체포되어 [[평양]] 삼합리[[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46년 2월 중국의 훈춘, 러시아의 그로데코보를 거쳐 [[하바로프스크]]로 이송되었고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소재불명으로 기소중지되었다. [[분류:청양군 출신 인물]][[분류:1908년 출생]][[분류:고등문관시험 출신]][[분류:공주고등학교 출신]][[분류:규슈대학 출신]][[분류: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