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윤봉현}}}'''[br]'''尹奉鉉[* 尹'''{{{+1 琫}}}'''鉉으로 표기된 문헌도 있다.]'''}}}}}} || || '''본관'''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漁樵隱公派) 28세 현(鉉) 항렬.] || ||<|2> '''출생''' ||[[1922년]] [[3월 9일]][* 음력 2월 11일.] ||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368번지[* 이 지번의 필지는 1915년 1월 10일 [[토지조사사업]] 당시 윤봉현의 조부 윤충하(尹忠夏, 1873. 6. 7 ~ 1944. 4. 10)의 소유였다. 이후 ] || ||<|2> '''사망''' ||[[1944년]] [[5월 25일]][* 해남윤씨대동보 권8 1175쪽에는 1943년 4월 14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향년 22세) ||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부]]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239호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孤山) [[윤선도]]의 12대손이다.[* 윤선도의 장남 윤인미(尹仁美, 1607. 3. 15 ~ 1674. 4. 25)의 후손이다.] [[대법원장]]을 지낸 [[윤관(법조인)|윤관]]은 6촌 재종제(再從弟)이며, [[광주고등법원]]장 [[윤준]]은 7촌 재종질(再從姪)이다. == 생애 == 1922년 3월 9일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368번지에서 아버지 윤재술(尹在述, 1908. 6. 20 ~ ?)과 어머니 [[연주 현씨]](1898. 4. 14 ~ 1939. 11. 10)[* 현용호(玄龍鎬)의 딸이다.]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주서중학교]] 재학 중이던 1941년 3월 2일, 졸업을 앞두고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677|기환도]](奇桓度)·[[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820|기태룡]](奇泰龍)·[[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0958|신균우]](申均雨) 등 17명의 동지들과 함께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부]] 금정(現 [[광주광역시]] [[동구(광주광역시)|동구]] 금동)에서 모임을 갖고 1938년에 조직된 광주서중학교 독서회를 무등회(無等會)로 개칭하고 조직을 재정비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광주서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계속 무등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43년 5월부터 6월까지 [[학병]] 지원 반대·[[창씨개명]] 반대·[[일본어]] 상용 반대·[[징병]]제도 반대 등의 표어를 내걸고 [[전라북도]] [[전주시|전주부]]·[[순창군]]·[[고창군]] 등에 거주하는 동지들과 연락하면서 동맹휴학으로 대표되는 광주서중학교 제2차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곧 일본 경찰에 거사 계획이 드러나 [[만주국]] [[봉천성]] [[선양시|봉천시]]로 피신했다가 결국 그곳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광주형무소에 투옥된 그는 취조과정에서 잔학한 고문을 받았고, 병으로 인해 [[가석방]]되었으나 석방된지 10일만인 1944년 5월 25일 전라남도 광주부에서 별세, 순국했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1월 2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해남 윤씨]][[분류:해남군 출신 인물]][[분류:1922년 출생]][[분류:194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광주제일고등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