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윤경현}}}'''[br]'''尹炅鉉'''}}}}}} || || '''자 / 호''' ||경석(炅錫) / 율애(栗涯) || || '''본관''' ||[[해남 윤씨]][* 호군공파(護軍公派) 28세 현(鉉) 항렬.] || ||<|2> '''출생''' ||[[1911년]] [[9월 6일]]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강진)|보암면]] 율포리[br]{{{-2 (現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강진)|도암면]] 학장리 율포마을 443번지[* [[https://theme.archives.go.kr/next/acreage/viewCadastreDetail.do?packid=0000230778&docid=0008211970&mngno=BJCA486023&type=12&want=1|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의 필지는 1915년 당시 윤경현의 아버지 윤재상(尹在桑, 1886. 11. 19 ~ 1949. 12. 14)의 소유였다.])}}} || ||<|2> '''사망''' ||[[1934년]] [[10월 9일]][* [[https://dnc.go.kr/_prog/_board/?mode=V&no=30132&code=merit&site_dvs_cd=kr&menu_dvs_cd=0208&s_post_dvs_cd=&skey=&sval=&GotoPage=123|대전현충원묘적부 참조]].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61|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32년 8월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고, 해남윤씨대동보 권6 200쪽에는 1933년 10월 9일 옥사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 ||[[전라남도]] [[강진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434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11년 9월 6일 전라남도 강진군 보암면 율포리(現 강진군 도암면 학장리 율포마을 443번지)에서 아버지 윤재상(尹在桑, 1886. 11. 19 ~ 1949. 12. 14)과 어머니 [[안산 김씨]](1884. 9. 17 ~ 1934. 8. 4)[* 김중권(金重權)의 딸이다.]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강진군 [[대구면]] 마량리(現 강진군 [[마량면]] 마량리)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410&evntId=0034992056&evntdowngbn=Y&indpnId=000002306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이주했다]].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중이던 1930년 3월, 일제 식민통치 정책의 부당성을 깨닫고 항거하기로 결심한 뒤, 같은 학교에 다니던 학 이용기(李容起)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때 그는 주로 같은 학교 학우들을 대상으로 포섭 활동을 벌였으며, [[여수시|여수군]] 여수면 동정(現 [[여수시]] [[동산동(여수)|동산동]])에 있던 종고산(鐘鼓山)을 집합장소로 하고 항일의식을 길러 나갔다. 이들은 매주 1회씩 모임을 갖고 일제의 민족차별 및 [[민족말살정책]]을 규탄하는 한편, 항일투쟁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1930년 9월 조직의 활동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고, 그는 주동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1930년 12월 20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486&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9578&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받았으나]], [[공범]]이 다른 지청에 송치되어 구류가 계속 이뤄졌다. 이후 10여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겪다가 1931년 7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예심이 종결되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42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9291&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광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9월 4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410&evntId=0034992056&evntdowngbn=Y&indpnId=000002306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공소했으나 11월 12일[*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304&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8897&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형사사건부-1]]·[[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82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8896&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형사사건부-2]]에는 1931년 12월 12일로 오기되어 있다.] 대구복심법원 형사제1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불경죄|불경]]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958&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0832&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공소할 이유가 없다고 하여]] 원심 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2심 미결 구류일수 중 6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410&evntId=0034992042&evntdowngbn=Y&indpnId=0000023049&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1934년 10월 9일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만 2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2년 12월 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해남 윤씨]][[분류:강진군 출신 인물]][[분류:1911년 출생]][[분류:193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