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능연각 24 공신)] ||<-2> '''능연각훈신[br]기양공(夔襄公)[br]{{{+1 劉弘基 | 유홍기}}}''' || || '''[[시호|{{{#fff 시호}}}]]''' ||양공(襄公) || || '''[[작위|{{{#fff 작호}}}]]''' ||하간군공(河間郡公) → 임국공(任國公) → 기국공(夔國公) || || '''이름''' ||유홍기(劉弘基) || || '''생몰''' ||582년 ~ 650년 || || '''부친''' ||유승(劉昇) || || '''출신''' ||옹주(雍州) 지양현(池陽縣) || || '''국적''' ||수(隋) → 당(唐)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장군으로 [[능연각훈신]] 중 한 명이다. == 생애 == === 수나라 시기 === 유홍기는 [[수나라]] 옹주 지양현(現 섬서성 [[셴양시]]의 일부)에서 하주 자사 유승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협객들과 교유하여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유홍기는 뒤에 음서를 통해 수나라 조정으로부터 우훈시(右勳侍)로 임명되었다. 당시 수나라의 황제였던 [[양제(수)|양제]]가 [[고구려-수 전쟁|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면서 유홍기는 고구려 원정에 종군하게 되었다. 당시 유홍기는 집안이 가난하여 있는 힘을 다하지 못했고 분음(汾陰)에 도착한 뒤 기일이 지연되면 자신이 참수될 것을 알았지만 아무런 방도가 없어서 일부러 소를 죽이고 체포되어 투옥되면서 죄를 죄로 덮어 원정을 피하게 된다.(...) === 이연의 거병에 참여하다 === 유홍기는 1년 뒤에 풀려나고, 망명하여 말을 훔친 뒤에 자급하다가 태원에 당도하여 태원 유수인 [[고조(당)|이연]]과 만나 그를 섬기게 되었고, 이연의 아들인 [[이세민]]에게도 신뢰를 받는다. 이연이 장차 거병을 준비할 때, 유홍기는 군사 2000명을 모았다. 그런데 왕위(王威)와 고군아(高君雅)가 이연의 행동을 의심하자, 유홍기는 이연에게 이를 알렸고 [[장손순덕]]과 함께 이연의 뒤에 숨었다가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 이연이 거병한 뒤, 유홍기는 송로생(宋老生)을 격파하여 우광록대부로 임명된다. 뒤에 유홍기는 앞장서서 황하를 건너 빙익을 함락시켜 위북도(渭北道) 대사로 임명되었고, 서쪽으로 부풍을 공략하여 군대를 6만까지 불렸다. 유홍기는 남쪽으로 위수를 건너 군세를 과시하고 수나라의 장수인 위문승(衛文升)을 물리치는 공적을 세우기도 하였고, 장안을 함락시킬 때는 제1의 공적을 세운다. 뒤에 [[설거]]가 부풍을 침략할 때도 유홍기는 공적을 세워, 우영도독(右領都督)으로 임명되고 하간군공(河間郡公)으로 책봉되었으며, [[단달]]과 장지진을 물리치는 활약을 하였다. === 당나라 시기 === 618년 [[당나라]]가 건국된 뒤, 유홍기는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진왕 이세민을 따라 다시 설거를 토벌할 때 종군하였는데, 이세민이 병으로 눕고 설거에 의해 군대가 패배하는 상황에서도 고군분투하였으나, 화살이 다하여 설거에게 사로잡힌다. 하지만 설거가 급사하면서 당나라에게 전세가 역전되었고, [[설인고]] 토벌에 공헌하여 관작을 되찾는다. 619년 [[유무주]]의 부하인 송금강이 태원을 공격했을 때, 유홍기는 진주(晉州)에 주둔하여 유무주에 대비하였으나 사로잡혔다. 그후 유홍기는 자력으로 탈출하여 귀환하였다. 유홍기는 이세민의 휘하에서 다시 유무주의 군대를 공격하여 물리쳤고, 임국공(任國公)으로 책봉된다. 유홍기는 [[유흑달]]을 토벌할 때도 종군하여, 병월장군(秉鉞將軍)으로 제수된다. [[돌궐]]이 침입해올 때, 유홍기는 자오령에서 임경(臨涇)에 이르는 경계에 진수하여 돌궐에 방비한다. 626년, [[현무문의 변]]이 일어날 때, 유홍기는 이세민의 즉위를 돕는다. 그러나 627년 이효상(李孝常)과 장손안업(長孫安業)이 반역을 꾀할 때, 유홍기는 이효상과 교유가 있었기 때문에, 모반에 연루되어 제명된다. 1년 뒤 유홍기는 역주(易州) 자사로 복귀하여 관작을 되찾고 위위경(衛尉卿)으로 제수되었다. 635년에는 기국공(夔國公)으로 개봉되고, 낭주(朗州) 자사를 세습하였다. 유홍기는 노년에 들어 사직을 청하고 보국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태종(당)|태종]]이 645년 [[고구려-당 전쟁|고구려 원정]]을 일으키면서 유홍기는 전군대총관(前軍大總管)으로 임명되어 고구려 원정에 종군하였고, [[주필산 전투|주필산]]에서 [[고연수]]와 맞서 싸운다. 유홍기는 650년 실봉 1100호를 받고 세상을 떠난다. 3대 황제였던 [[고종(당)|당고종]]은 유홍기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를 개부의동삼사, 병주 도독으로 추증하고 양(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유홍기는 임종하면서 아들들에게 각각 노비 15명과 밭 5경을 주었고, 다른 가산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당나라의 장수]][[분류:셴양시 출신 인물]][[분류:중국의 공신]][[분류:개국공신]][[분류:582년 출생]][[분류:650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