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영포원공(營蒲元公)[br]{{{+1 劉遵考 | 유준고}}}''' || || '''시호''' ||원(元) || || '''작위''' ||영포현공(營蒲縣公) || || '''성''' ||유(劉) || || '''이름''' ||준고(遵考) || || '''생몰''' ||392년 ~ 473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송(남조)|유송]]의 종실이다. == 생애 == 처음 유유의 참군을 지냈으며, [[노순]]을 토벌할 때 종군하여 향후(鄕侯)에 봉해졌다. 뒤에 건위장군(建威將軍), 팽성군 내사로 유유의 북벌에 종군했다.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이 평정된 뒤 도독병주사주북하동북평양북옹주신평안정5군제군사(都督幷州司州北河東北平陽北雍州新平安定五郡諸軍事), 보국장군(輔國將軍)·병주 자사로 제수되고 하동군 태수를 겸했으며, 포판(蒲坂)에 주둔했다. 그러나 유유가 건강으로 돌아간 뒤 동진 장수들의 내분을 틈타 [[북하]]의 [[혁련발발]]이 추격해오자, 유준고 또한 동진으로 돌아와 유격장군(游撃將軍)으로 제수되고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 옮겼다. 420년, 유유가 [[동진]]의 마지막 황제 [[공제(동진)|공제]] 사마덕문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른 뒤 유준고는 사마덕문이 거처하는 말릉궁을 수비했다. 또한 영포현후(營浦縣侯)에 봉해지고 식읍 500호를 받았으며, 팽성패2군(彭城沛二郡) 태수를 겸하였다. 423년,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옮겼다. 425년, 정로장군(征虜將軍)·회남군(淮南郡) 태수로 옮겼다. 430년, 태자우위솔(太子右衛率)로 제수되고 급사중(給事中)이 더해졌다. 461년, 상서우복야·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옮겼고 산기상시는 예전과 같이 받았다. 462년, 상서좌복야로 전임되었고 서주 자사·대중정·숭헌궁(崇憲宮) 태복(太僕)을 겸임하였다. 466년, 숭헌태후가 죽자 태복에서 해임되었고 나머지 벼슬은 예전과 같이 받았다. 472년, [[후폐제(유송)|후폐제]]가 즉위하자,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로 진위되고 나머지 벼슬은 예전과 같이 받았다. 유준고는 이듬해인 473년에 사망하여 좌광록대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추증되고 시중은 예전과 같이 받았으며, 원(元)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가계 == 유준고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조부는 [[유욱손]](劉旭孫)으로, 유준고의 증조부는 유유의 증조부인 무원현령(武原縣令) [[유혼(동진)|유혼]](劉混)의 동생 유순(劉淳)이다. 조부는 유암(劉巖)으로 해서현령(海西縣令)을 지냈다. 부친은 유연자(劉涓子)로 팽성군(彭城郡) 내사를 지냈다. 그래서 유준고와 유유는 촌수가 8촌인 족형제 관계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송(남조)/황족]][[분류:392년 출생]][[분류:473년 사망]][[분류:팽성 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