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456년 사망]][[분류:조선의 무관]][[분류:기계 유씨]][[분류:사육신]][[분류:거열형된 인물]] [include(틀:사육신)] [목차] == 개요 == [[사육신]] 중 한 명으로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이다. 용맹하며 칼싸움과 활을 잘 쏘는 등 전쟁을 잘해서 [[세종대왕|세종]]과 [[문종(조선)|문종]]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지를 받았다. [[과거 제도#s-4.3.2|무과]] 출신으로 첨지중추원사, 경원도호부사, 경원절제사, 의주 [[목사(관직)|목사]], 평안좌도절제사, 판강계도호부사 등을 두루 거쳐 [[세조(조선)|세조]]가 즉위한 뒤 동지중추원사에 임명되었는데, 지극히 청렴한 성품 탓에 고위 관직을 지냈으면서도 [[초가집]]에서 살았으며 때로는 끼니를 거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 생애 == 1456년(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이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알현해 연회를 개최하는 날 공식석상에서 유응부 장군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등을 별운검[* 2품 이상의 무관이 검을 차고 국왕을 호위하던 임시직.]으로 선정해 그 자리에서 세조를 시해하고 [[단종(조선)|단종]]을 다시 복귀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한명회]]에 의해 세조가 별운검을 취소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유응부는 그래도 강력하게 계획대로 하고자 했지만 성삼문과 박팽년 등이 거사를 뒤로 미루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세조 암살은 결국 시행되지 않았는데, 게다가 이 작전을 함께 주도했던 [[김질]]의 배반으로 장인인 [[정창손]]에게 고발하면서 작전 계획이 발각되었다. 결국 다른 사육신과 함께 잔인하게 국문을 당하는데, 남효온의 [[육신전]]에는 유응부는 '달궈진 철로 전신을 지지는데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을뿐더러 철이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고 형리에게 호통을 치거나 성삼문 등을 향해 군인이, 입만 산 서생들과 같이 계획을 짜면 안 된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더라[* 연회장에서 그대로 세조를 시해했어야 했는데 성삼문 등이 굳이 말리는 바람에 일이 이리되었다는 분노의 뜻이다.]고 분노하는 등 패기 넘치는 일화들이 기록되어 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장릉배식록 수록자)] ---- [include(틀:진승총(기타 사서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