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송(남조)/인물]][[분류:411년 출생]][[분류:462년 사망]][[분류:팽성 유씨]] [include(틀:송서)] ||<-2> '''동창문목후(東昌文穆侯)[br]{{{+1 劉延孫 | 유연손}}}''' || || '''시호''' ||문목(文穆) || || '''작위''' ||동창현개국후(東昌縣開國侯) || || '''성''' ||유(劉) || || '''이름''' ||연손(延孫) || || '''생몰''' ||411년 ~ 462년 || || '''부친''' ||팽성군(彭城郡) 여현(呂縣) || || '''부친''' ||[[유도산]] || [목차] [clearfix] == 개요 == [[송(남조)|유송]]의 관료로 [[유도산]]의 아들이다. == 생애 == 처음 서주(徐州)에서 주부를 지냈다가 수재로 천거되어 사도 팽성왕 유의강의 행참군이 되었으며, 상서도관랑(尙書都官郞), 전당현령(錢唐縣令), 무릉왕 유준의 중병참군, 남청하군태수를 역임했다. 448년 유준이 서주자사로 부임할 때 치중종사사로 보임되었고 서주에 진수하였다. 450년 [[북위]]가 현고(縣瓠)를 공격하고 군대를 나누어 약탈한 백성들을 여양(汝陽)으로 보냈다. 이때 유송 조정에서는 유준에게 여양을 습격하도록 명했는데, 유준이 방안을 논의할 때 유준의 부하들은 모두 유연손을 추천했다. 그러나 유연손은 장수로서의 재간이 없음을 호소하며 사양했고 유태지(劉泰之)를 자신의 대임으로 추천한다. 유태지의 출병 소식을 안 [[문제(유송)|문제]]는 분노하여 유연손을 면직시켰다. 453년, 문제의 태자 [[유소(유송)|유소]]가 문제를 시해하고 제위에 올랐다. 이에 유준이 유소를 토벌하고자 거병했고 유준의 부에 고급 보좌관이 부족해지자, 유연손은 장사, 심양군태수로 전임되고 부의 사무를 처리하였다. 그리고 유준이 유소를 토벌하고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4대 황제인 [[효무제(유송)|효무제]]였다. 유연손은 시중으로 임명되고 전군장군을 겸임하며 효무제의 중신이 되었으며, 동창현후(東昌縣侯)에 봉해지고 식읍 2,000호를 받았다. 뒤에 위위(衛尉)로 전임되어 금위군을 맡았다. 454년, 단양윤으로 옮겼다. 이때 남군왕 유의선이 장질과 손을 잡아 반란을 일으키자, 효무제는 강동의 정세를 염려하여 유연손을 관군장군으로 삼고 오흥군으로 전출시켰다. 반란이 평정된 뒤 유연손은 상서우복야로 제수되고 서주 대중정을 겸임하였다. 뒤이어 강릉으로 파견되어 선악의 분별과 상벌의 시행을 엄격하게 하여 형주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456년, 남연주자사(南兗州刺史)로 전출되고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더해졌다. 뒤이어 사지절(使持節), 감옹량남북진4주영주경릉수2군제군사(監雍梁南北秦四州郢州竟陵隨二郡諸軍事), 진군장군(鎭軍將軍), 영만교위(寧蠻校尉), 옹주자사로 전임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했고 대신 시중, 호군장군이 되었고 서주 대중정을 겸임하였다. 유연손의 병은 그해에 심해져서 효무제가 황문시랑을 보내 유연손의 병세를 살피게 했다. 457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제수되고 태자첨사(太子詹事)를 겸임하였으며, 중정은 예전과 같이 받았다. 그리고 다시 진군장군, 남서주자사로 전출되었다. 459년, 유탄이 광릉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유연손은 먼저 중병참군 두유문(杜幼文)을 파견하여 유탄을 토벌하도록 명했으나 유탄이 이미 성문을 닫고 농성했기 때문에 두유문은 결국 회군하였다. 한편 유탄이 유공태(劉公泰)를 유연손에게 파견하면서 같이 반란을 일으키자는 서신을 같이 보냈으나, 유연손은 유공태를 참수하고 유공태의 목을 수도로 보냈다. 뒤이어 유연손은 두유문에게 군대를 이끌어 장강을 건너 심경지(沈慶之)를 지원하도록 명했다. 유탄의 반란이 평정된 뒤 유연손은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진위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461년, 유연손은 시중, 상서좌복야로 임명되고 영군장군(護軍將軍)을 겸임하였으며, 남서주자사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이때 병이 심해져서 462년 사망했다. 효무제는 주수지를 대신하여 유연손을 형주자사로 임명하려고 했으나 유연손의 부고가 전해진 뒤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사도로 추증하였다. 태상의 관리들이 유연손의 시호를 충목(忠穆)으로 할 것을 건의했으나 효무제는 유연손의 시호를 문목(文穆)으로 하였다. 유연손 사후 아들인 유질(劉質)이 후사가 되었으나 [[명제(유송)|명제]] 태시 연간에 명제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유자훈을 추대했다가 처벌되어 국이 단절되었다. == 기타 == 유연손을 남서주로 전출시키기 이전인 422년, [[무제(유송)|무제]]가 임종할 때 내린 경구(京口)는 중요한 땅으로 수도인 건강과 가까운 곳에 있으니 종실의 가까운 친척 이외에는 그곳에 부임시키지 말라는 유조를 내렸다. 유연손은 비록 황실과 같은 팽성 유씨였으나 본적은 팽성군(彭城郡) 여현(呂縣)이었다. 팽성현(彭城縣)에 거주하는 유씨(劉氏)의 경우 유송 황실의 본적은 팽성현 수여리(綏輿里)였고, 좌장군(左將軍) [[유회숙]]의 본적은 팽성현 안상리(安上里)였고, 예주자사(豫州刺史) 유회무(劉懷武)의 본적은 총정리(叢亭里)였다. 비록 이들의 조상은 [[전한]]의 [[고제(전한)|고제]]의 동생 초원왕(楚元王) [[유교(전한)|유교]]였으나 촌수를 정한 적이 없었다. 유연손은 팽성 유씨지만 종실의 일원은 아니었기에 남서주자사로 전출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효무제는 서주자사로 있었던 사공(司空) 경릉왕(竟陵王) [[유탄(유송)|유탄]]을 매우 시기하여 경구에 부임시키지 않으려고 유탄을 광릉(廣陵)으로 전출시켰다. 결국 유연손을 남서주자사로 삼은 것은 효무제가 유탄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효무제는 친왕들에게 유연손과 인척 관계를 맺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유탄이 토벌된 뒤 효무제는 유연손을 남서주자사로 임명한 것이 특별한 경우였음을 설명하며 자신의 아들인 유자란을 남서주자사로 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