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동명이인/ㅇ]] [목차] == 안성시 출신 독립운동가, 유만수 == ||||<:>[[파일:유만수.jpg|width=300px]] || || 성명 ||유만수(柳萬秀) || || 본관 ||[[진주 류씨]][* 토류계 백참판공파 25세 '''수(秀)''' 년(秊) 항렬.] || || 생몰 ||[[1923년]] [[10월 24일]] ~ [[1975년]] [[4월 25일]][* 진주 류씨 토류계 족보에는 3월 13일에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 || [[출생지]] ||[[경기도]] [[안성시|안성군]] 금광면 개산리[[http://www.pa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89|#]] || || 사망지 ||[[경기도]] [[안양시]]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유만수는 1923년 10월 24일 경기도 안성군(현 안성시) 금광면 개산리에서 부친 유원목(柳遠穆)과 모친 [[함양 박씨]] 박수진(朴守鎭)의 딸 사이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안성읍내 [[안성초등학교(경기)|안성공립소학교]]와 [[한영고등학교(서울)|서울 한영중학교]]를 졸업한 뒤 [[한성고등학교|한성상업학교]] 야간부에 다니며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낮에는 공장에 나갔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생활하던 그는 1943년 5월 일본 [[가와사키시]]에 있는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에서 근무중인 한국인 노무자들이 궐기하여 민족차별에 반대하는 농성시위에 참가해 식당 파업을 주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일본강관주식회사가 이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억압하자, 유만수는 기회를 틈타 회사를 탈출한 뒤 일본 내의 노무자 단체를 전전하면서 일본으로 강제 징용되어 온 동포의 구출활동을 한 후 귀국하였다. 그 후 1945년 3월, 그는 서울 관수동의 자신의 자택에서 [[강윤국]], [[조문기]]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고관과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하여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생사를 같이 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대한애국청년당의 의장을 맡아 친일파 인사들을 처단할 방안을 모색하던 중 [[박춘금]]이 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하고 [[경성부]] [[부민관]]에서 대의당 주최로 '아시아 민족 분격대회'를 대대적으로 열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대회는 조선인들을 선동해 일본군을 위해 싸울 총알받이로 내몰려는 목적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이 날 행사에는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장성급 장교|장성]], [[친일반민족행위자]] 세력들이 다수 참석했으며, 일제의 괴뢰정권인 [[왕징웨이 정권]]의 대표 정원간(丁元幹)·정유간(鄭維幹) 및 [[만주국]]의 대표 강춘전(康春田)[* 당춘전(唐春田)이라고도 한다.] 등도 연사로 참여했다. 이 소식을 접한 대한애국청년당은 부민관에 폭탄 테러를 가하기로 결의했다. 유만수는 다이너마이트를 빼내오기 위해 수색 변전소 작업장에 인부로 잠입해 발파작업을 맡으면서 다이너마이트를 조금씩 빼돌려 10여 일 후 뇌관 2개를 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강윤국은 일본 헌병으로부터 권총 한 정을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1945년 7월 24일 저녁 7시, 유만수, 조문기, 강윤국은 대의당 주최 <아시아분격대회>가 열리는 부민관 연단 밑에 [[다이너마이트]]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연설 도중 터뜨려 대회를 무산시켰다. 이것이 바로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명이 폭사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고, "아시아 민족 해방"이란 명목으로 조선인들에게 일본군의 총알받이가 되라고 선동하려던 [[박춘금]]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총독부는 즉각 수사에 착수했고 비밀결사 단체였던 [[건국동맹]]을 포착한 뒤 [[조동호]] 등 여러 인사들을 체포했다. 또한 사건의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수배령을 내렸고, 박춘금은 직접 사재를 털어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하지만 유만수 등은 수사를 피해 몸을 숨겼다가 한달도 안되어 [[8.15 광복]]을 맞이해 자유의 몸이 되었고, 박춘금은 일본으로 도피했다. 광복 후, 유만수는 동지들과 함께 서울의 남대문 상동교회에 <애국청년당>의 간판을 내어 걸고 독립운동 선배인 조동필 목사를 당주로 모셨으며,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에도 참석하고 남한 단독정부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후 조문기와 함께 인민청년군을 결성했다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남로당의 사주를 받은 무장유격대로 낙인찍혀 몇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 후 평소 익힌 철공기술로 서울 신당동에 작은 철공소를 운영하며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려 했지만, [[6.25 전쟁]] 시기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인민군 토지개혁지도위원'이 되어 임지인 남원에 내려갔으나 곧 국군의 반격으로 서울로 돌아온 일이 빌미를 잡히는 바람에 또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1959년엔 조문기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다 누명임이 밝혀지면서 겨우 풀려났다. 출옥 후 서울을 떠나 부산 연지동에 단칸셋방을 얻어 둥지를 틀고 초량동 동양고무 기술이사로 특채된 그는 서훈신청을 하라는 주변의 권유에 "당연한 일을 했다. 당시는 누구나 나 같은 애국하는 맘을 가지고 있었다"라며 거부하다가 1975년 4월 25일 경기도 안양시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유만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분류:안성시 출신 인물]][[분류:진주 류씨(토류)]][[분류:1923년 출생]][[분류:1975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한영고등학교 출신]][[분류:한성고등학교 출신]] == 평택시 출신 독립운동가, 유만수 == || 성명 ||유만수(柳萬壽) || || 생몰 ||[[1895년]] [[6월 8일]] ~ [[1946년]] [[3월 6일]] || || [[출생지]] ||[[경기도]] [[평택시|진위현]] 현내면 주막동[br](현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 || 사망지 ||[[경기도]] [[평택시|평택군]] || || 추서 ||대통령표창 || 유만수는 1895년 6월 8일 경기도 진위현 현내면 주막동(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31일 경기도 진위군 북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면사무소 및 경찰관 주재소 앞 등에서 4백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태형 90도를 맞았다. 이후 진위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6년 3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유만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분류:평택시 출신 인물]][[분류:1895년 출생]][[분류:1946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