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후한의 5대 황제 , rd1=상제(후한))] [include(틀:운대 28장)] [include(틀:후한서)] 劉隆 (? ~ 57) [목차] == 개요 == 양한교체기의 인물로, 자는 원백(元伯). 형주 남양군(南陽郡) 사람으로, 아버지 유례(劉禮)가 반[[왕망]] 활동을 전개하다가 잡혀 멸족된 탓인지 출신 현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한]]의 안중후(安眾侯) 유숭(劉崇)과 종실 사이라 나름 한나라 황족이기도 하다. == 생애 == [[경제(전한)|경제]]의 아들 장사정왕 유발(劉發)의 5세손인 안중후 유숭이 재상 장소(張紹) 등 100여 명과 함께 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아버지 유례는 유숭과 친척 사이라 반란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유숭의 난은 완(宛) 공략 실패로 허무하게 막을 내렸으며, 전한의 권신이었던 왕망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가황제(假皇帝)를 자칭하고 반란자들의 집안을 멸족하도록 하였다. 나이가 일곱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던 유륭은 당시 법상으로 처벌 대상자가 아니라 금방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유륭은 장안(長安)에 머물면서 공부를 하였다. 경시 2년(24년) 2월, [[경시제]]가 장안에 입성해 도읍으로 삼고 [[현한]] 정권을 수립하였다. 유륭은 현한에 출사하여 기도위가 되었다가, 얼마 안가 휴가를 내어 고향으로 가 처자식들을 데리고 낙양으로 이주하였다. 그 해 가을, 하북으로 원정을 나갔던 소왕(蕭王) [[광무제|유수]]가 왕랑, 동마적 등을 물리치고 지금 하내군(河內郡)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퍼졌다. 유수가 이미 경시제의 소환령을 거부해 본격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관계로, 유륭은 경시제의 관직을 버리고 하내군 사견(射犬)으로 달려가 유수에게 귀순하였다. 유수는 그를 기도위로 삼아 편장군 [[풍이(후한)|풍이]]의 휘하에 배속시켜 낙양에 현한군을 거느리고 있던 주유(朱鮪)와 이일(李軼) 등으로부터 하내군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유륭이 도망갔다는 것을 알고 낙양에 있던 그의 가족들을 잡아 처형하였다. 건무 원년(25년), 유수가 조(趙)와 연(燕) 땅을 복속시키기 위해 북으로 원정을 떠나면서 풍이를 맹진(孟津)에 주둔시키고 [[구순]]을 하내태수에 임명해 하내를 지키게 하였다. 그렇게 주력군이 하내를 떠나자 과연 유수의 염려대로 낙양의 주유는 토난장군 소무(蘇茂)에게 병력 3만을 주어 하내를 침공하게 했다. 유륭은 풍이를 따라 출정하여 소무를 격파하고 구순을 도와 하내를 무사히 지켜내는 공을 세웠다. 한편, 북으로 갔던 유수는 원정을 무사히 마치고 호현(鄗縣)에서 제장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올랐다. 건무 2년(26년), 항부후(亢父侯)에 봉해졌다. 건무 4년(28년), 주로장군에 임명되어 양무장군 [[마성(후한)|마성]]을 따라 군벌 이헌(李憲)을 정벌하는 데 동참하였다. 이헌 평정 이후 광무제는 유륭을 무당(武當)으로 보내 그곳에서 둔전을 시행하게 하였다. 건무 11년(35년), 정남대장군 [[잠팽]]이 형문(荊門)에서 [[공손술]]의 익강왕 전융(田戎)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에 광무제는 대사마 오한, 주로장군 유륭 등을 보내 잠팽을 돕게 하였다. 잠팽이 마침내 전융을 격파하고 그를 쫓아 익주로 들어가면서 유륭을 남군태수로 삼아 형주의 수비를 맡겼다. 그리고 남군태수에 부임한 지 1년차가 되던 해에 유륭은 장군의 인수를 반납하였다. 건무 13년(37년), 대사마 오한이 익주를 평정하고 수도로 개선하면서 대륙이 통일되었다. 광무제는 이를 기념하여 모든 공신들의 식읍을 늘려주고 유륭을 경릉후(竟陵侯)로 개봉하였다. 건무 15년(39년), 당시 새로 개간된 밭이 많았음에도 주군(州郡) 관청에 제대로 보고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였고, 호적에 보고되는 연령이 해마다 심하게 널뛰기 하는 등 호구 조사가 엉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광무제는 후한의 모든 주군에 조서를 내려 토지와 호구 조사를 제대로 실시할 것을 명하였다. 그럼에도 여러 주자사와 태수는 호족을 두둔하고 거짓으로 보고를 올려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니, 피해를 입은 백성들이 길을 막고 울부짖었다. 광무제는 하는 수 없이 각 지역에 알자(謁者)들을 파견해 불시 검열에 들어갔다. 조사 결과, 대사도 구양흡(歐陽歙)이 여남태수로 재직하던 시절, 지역 호족에게서 뇌물 1천만 전을 받고 토지를 허위로 측량한 사실이 밝혀졌다. 광무제는 몹시 노해 구양흡을 옥에 가두고, 다른 지역도 계속 조사하여 간악한 정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건무 16년(40년), 남군태수 유륭도 뇌물을 받고 허위 측량한 정황이 포착되어 하옥되었다. 유륭과 함께 비리를 저지른 일당 10여 명도 잡혀 주살되었으며, 광무제는 유륭의 공을 감안해 평민으로 강등시키는 것으로 끝냈다. 건무 17년(41년), 광무제는 유륭을 복권시켜 중랑장에 임명하고 부락향후(扶樂鄕侯)에 봉했다. 그리고 복파장군 [[마원(후한)|마원]]을 도와 반란을 일으킨 무릉만이와 [[교주(중국)|교주]]의 징측(徵側) 등 오랑캐들을 정벌하라 명했다. 유륭은 마원과 군사를 나눠 따로 행동하면서 금계구(禁谿口)에서 징측의 무리를 격파해, 그 대장인 징이(徵貳)를 사로잡고 적병 천여 명을 참했으며 2만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유륭이 수도로 개선하자 광무제는 그를 장평후(長平侯)에 봉했다. 건무 20년(44년), 대사마 오한이 사망하였다. 광무제는 유륭을 표기장군으로 삼아 대사마의 업무를 대행하게끔 하였다. 유륭은 지난 날의 과오를 거울 삼아 관직에 있으면서 항상 법을 받들었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공무를 보았다. 건무 27년(51년), 장군의 인수를 반납하고 은퇴하였다. 광무제는 소와 상준주(上樽酒) 백 말을 하사하고 봉조청(奉朝請)으로 삼아 조정에 행사나 의례 등이 있을 때만 입조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무 30년(54년), 신후(慎侯)로 전봉되었다. 중원 원년(57년), 사망하고 아들 유안(劉安)이 그 뒤를 이었다. 시호는 정(靖). [[분류:후한의 인물]][[분류:한나라의 공신]][[분류:57년 사망]]